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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기덕희덕 Dec 20. 2023

얼룩얼룩 수채화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

그림 안에 갇혀 이리저리 물감의 물성에 딸려가다보면 정신을 못차립니다.
마음에 안드는 것 투성이죠.
그러다 자리털고 일어나 한발 물러나면 내가 보지 못한 전체가 보입니다.
그러면 어둠 속에 빛나는 빛, 얼룩이 만들어낸 흐릿함이 꽤 근사하게 느껴집니다.
 


홍익대학교 미술평생교육원 회화1 수업에서 그린 수채화 그림입니다. 참 제 성질이 못되서 그런지 특히나 구상화를 그리다보면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옵니다. 수채물감의 물성을 너무 사랑하지만 제 의도와 다르게 표현되면 그게 참 못마땅해요. 그럴때마다 물로 붓을 깨끗이 빨아 물로 쓱쓱 지웁니다. 마른 수건에 붓이 받아낸 물감과 물을 닦아내고, 다시 물붓으로 깨끗이 닦아내면 안료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을뿐 깨끗이 지워져요. 붓과 물이 지우개가 되어줍니다. 그러니 화는 날지언정 그림을 포기할 일은 없습니다. 마음에 안들면 다시 그리면 되구요. 수채물감이 두려움을 유발하는 재료라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어요. :-) 

수채물감은 가격, 접근성, 활용성 면에서 만만한 재료지만 재료를 잘 다루기 위한 숙련성을 많이 요구하는 재료예요. 그만큼 그림을 많이 그리다보면 재료에 대한 만족감, 실력이 향상되는걸 느낄 수 있어요. 내 의도를 수채화로 100% 표현하고,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마음만 조금 내려놓으면요. 장점이 너무 많은 재료예요. 종이, 파레트, 붓, 물을 간단히 가방에 넣고, 어느 자리든 펼쳐놓고 그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반드로잉의 채색재료가 수채물감이기도 하죠. 최소한의 표현으로 화지를 채우고, 물감의 농도로 명암을 만들고, 물성을 활용한 기법 한두개 알면 근사한 어반드로잉 하나 완성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제 수업에서는 수채물감을 많이 다룹니다. 


그림을 소개하고, 경험하게 돕는 일에는 자기작업이 꼭 수반되어야 합니다. 안내하는 입장인데 재료를 이해하고 다루지 못한다면 내담자, 학습자에게 안전한 지도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수업을 통해 제 작업을 이어가며 숙련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이번에는 구상화, 반추상화, 자화상, 자유화를 그렸습니다. 구상화를 그리다보면 지겨워져요.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올라오면서 과감한 시도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럴 때는 수채물감의 물성을 활용한 기법을 사용하는데 의도와 상관없이 표현되는 우연의 효과에 이미지를 추가하며 무의식적 자극에 반응하는 상징이미지로 나를 돌아보곤 합니다. 


수채물감을 듬뿍 화지에 칠하고 이것(?)을 덮으면 재미있는 물감자국이 남지요. :-)

여기까지는 참 좋았어요. 해볼 만 했죠. 그러나 자화상에서 턱 걸렸어요. 첫 장은 어눌했고, 두번째 장은 화지선택을 잘못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세번째 장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안에 있었어요. 급한 마음에 스케치를 대충한 죄로;; 그래도 굴하지 않고, 네번째 장에서는 완성을 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매번 다른 화지로 바꿨다는 점이예요. 처음엔 중목, 두번째는 세목, 세번째는 와트만지, 네번째는 수채캔버스를 사용했거든요. 종이에 적응할 기회도 주지 않고, 되는대로 바탕재료를 바꾼 것은 하지말아야할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수채캔버스 선택은 배울 수 있는 실수였어요. 


수채화 종이는 펄프의 가공방법에 따라 중목, 세목, 황목으로 나뉩니다. 질좋은 종이는 한 장에 몇만원도 할 정도로 고가이지요. 미숙한 화공이 그런 재료를 무턱대로 사용했다간 가산을 탕진하기 딱 좋죠. 와트만지로 다시 돌아가 그림을 많이 그리는게 오히려 나중을 위한 투자가 됩니다. 저도 명품 아르쉬지는 못사고 타사 100%코튼지를 구입해서 작업해보았지만 결과는 뻔했어요. 바탕재료가 큰 영향을 주지만 그렇다고 탓할 수도 없습니다. 수채캔버스는 물에 울지 않아요. 탄탄하게 보드판에 고정되어 있지요. 근데 면천소재라 물감이 화지에 잘 베어들어가지 않아요. 물을 잘못쓰면 더욱 얼룩덜룩.. 속은 타들어갑니다. 


네번째 수채자화상

근데 그림을 그리다보니 이 수채캔버스에 제가 길들여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니가 암만 용써봤자 나한테 안돼!'하는 것 같았죠. 저의 지나친 욕심은 재료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뭐 그동안 그린 것보다는 가장 잘되었다고 자기위로를 해주었답니다. :-)


결국 마지막 자유화도 수채캔버스로!

스튜디오를 오픈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나봐요.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습니다. 꼭 새벽 4시 반에 깨서 6시에 겨우 잠들어 한시간 자고 일어나는 불면의 패턴이 생겼습니다. 그날도 새벽에 깼는데 제 머리에서 생각이 뚫고 자라나는 느낌이었어요. 나뭇가지가 온사방에 펼쳐지고 그 가지들 사이사이에서 잔가지들이 마구마구 뻗어나왔죠. 이 머릿 속 생각은 멈추질 않았어요. 나무처럼 자라버린 생각은 너무 무거워 목을 가누기 힘들었습니다. 이쯤되면 마음 속에 싸이렌이 거침없이 울림니다. 멈추고 잘라내고 싶지만 그조차도 에너지가 소진되는 일이예요. 물 속에 잠겨있는 얼굴을 올려 숨을 고르고, 제 몸의 움직임을 느끼는게 낫죠. 이미 자란 나뭇가지가 겨울이 지나 스스로 가지치기가 되길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가지 끝에는 새잎과 열매, 꽃이 돋아날 것을 믿습니다.

참, 그림 몇장 그리는데 왜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까요? 사실 그림수업에 들어가면 그림그리는 과정,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 나누지 무엇때문에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서는 마음이 어땠는지.. 좋았던 경험과 나쁜 경험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아요. 저는 그게 우리가 그림그리며 나눠야할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이번 교수님은 다행히 다르셨습니다. 무엇이든 말해보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우다다다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털었습니다. 이 글처럼요. 그러고나니 '와 정말 나 잘 배웠구나' 만족할 수 있었어요.

그림의 모양새는 어떻게 해서도 완벽하지 않아요. 나의 의도를 재료가 그대로 표현해줄리 만무하고, 그림 그리는 과정에서 변하는 제 생각과 감정은 그림이 따라가주지 않습니다. 나와의 대화, 조율, 협의가 끊임없이 요구되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그래도 왜 그림을 그리는지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한 장 그리는면서 경험한 모든 과정이 그래도 결과물로 남아있는 것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수용하고, 좀 더 나아지려는 의지를 갖게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멀리서 보면 멋지지 않나요? 내 그림이.. 그리고 내가!!!

인생도 이런거같아요. 이 그림들처럼 잘났든못났든 분명 충분히 괜찮은 인생일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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