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림!!
최근에 새로 산 스마트tv에 푹 빠져 주말내내 딩굴거렸다. OTT 플랫폼에는 인기있는 프로그램을 순위를 친절히 매겨서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시시콜콜한 취향을 간파한 유튜브 알고리즘 덕에 검색따윈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짧으면 1분, 길면 2시간 정도 되는 개인컨텐츠, 영화, 드라마가 가득했고 볼 것이 너무 많았다. 스마트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스르륵 잠이 오면 그냥 잤다. 한숨자고 일어나 다시 빠르게 재생해서 보거나 기억나는 곳부터 되돌려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도 다시 되돌려서 본다면 어느 장면으로 가고 싶을까? 지금은 ‘정지’인 상태이다. 다른 일을 해야되거나 예기치않은 상황으로 멈춘게 아니라 내 의식이 ‘일단멈춤’을 눌렀다. 일에 대한 회의도 들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새로운 일에 겁없이 도전하고, 헤쳐나갔던 젊은 시절 패기는 번아웃과 팬데믹으로 시들시들하다. 지금 바라는 건 편안한 노후를 위해 진정 내가 좋아하는 일을 갖는 것이다. 나는 인생의 한 챕터에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지금, 과거의 한 지점으로 돌아가보았다.
나는 1990년 어느 날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큰오빠도 입시미술 학원을 다니고 있었기에 아빠는 집에서 둘이나 미술전공하면 가게에 부담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건 하고마는 고약한 성미가 있는 나는 조르고조르고졸라 학원비를 받아냈다. 홍대 정문 근처에 있는 학원을 등록해 미술을 시작했다. 처음 화실을 간 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소묘실에는 벽면 선반에 놓여있는 석고상들, 그 아래 소묘작품들이 붙여있었고, 공간에는 이젤들이 자유롭게 놓여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지도해주시는 대로 4B연필로 4절지 화지 안에 선연습을 하고, 예수각상을 뚫어져라 보며 3시간 동안 꼼짝않고 첫 그림을 완성했다.
당시 입시미술은 순수미술과 디자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공을 선택해서 입시를 위한 준비를 해야했다. 순수미술은 당장 돈을 벌기 어렵고, 재료비가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울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매달 학원비를 받느라 진땀을 뺐었기에 아빠에게 졸업후에도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구성’이라는 것을 선택해 입시준비를 시작했다.
순수미술을 선택하면 서양화, 동양화, 조소과로 세부전공을 선택해 준비하게 된다. 소묘는 공통이고, 전공에 따라 인물, 정물 수채화, 동양화, 조소를 하게된다. 나는 순수미술하는 언니오빠들을 부러워하며 작품들을 훔쳐보곤 했다. 당시 조소까지 하는 학원은 많지 않았기에 학원가를 지나다가 광고사진으로 붙여진 작품들로만 접했는데 만약 내가 흙을 만졌으면 바로 전공을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구성은 화지에 면을 분할하고, 색의 단계를 내서 정해진 포스터칼라로 깨끗하고 반듯이 자로 낸듯 날카롭게 납작붓으로 시간 내에 채색해야한다. 입시를 위해서 공식처럼 외워서 한 색단계 표현, 전형적인 도안이미지는 너무 재미없었다. 대학을 다닐 당시에는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이라 모두 수작업으로 했는데 난 자로 선을 반듯하게 긋고, 칼로 정확하게 자르는게 약해서 디자인과에 가서도 자주 실수를 했다. 그러나 소묘를 좋아하고 썩 잘한 편이어서 배우지 않은 회화작업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졸업하면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웹디자이너가 되었다.
사회에 나와 웹디자이너로 일했지만 트렌드에 따라 비슷한 이미지들로 표현되는 컴퓨터작업이 식상했고, 모니터 세상에서만 사는 느낌이 너무 답답했다. 결국 미술치료사로 직업을 바꾸고, 지금까지 미술을 도구삼아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미술이 가진 '치유적 힘'을 소개하는 유튜브 컨텐츠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돕고 싶어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교육을 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미술재료들을 소개하는 수업으로 나도 평소 다루지 않았던 미술재료들을 경험해보고, 각종 자료를 참고해 수업안을 만들어가며 진행하고 있다. 내가 만약 디자인을 하지 않고, 순수미술을 전공했다면 어땠을까.. 다시 되돌리고 싶은 장면을 고른다면 전공을 선택했던 그 순간으로 가고 싶다. 기억이 없는 그 순간에 대한 미련은 수업때문만은 아니다. 대형화방에 들어서면 가슴이 뛰고, 처음 보는 재료들을 써보면 흥미롭고, 어쩌다 그린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이런 모습이 아직도 나에게 있었나 신기하고 반가웠다. 순수미술을 전공해 화가가 되었다면 좀 더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머릿 속으로 상상만하기에 시간이 없다.
나는 미술심리상담사인 동시에 평생교육사이다. 평생교육원에서 수업하는 평생교육강사지만 동시에 평생교육원 학생이 되고자 한다. 인생 2막의 시작점에서 다시 학생이 되어 내 마음을 이끄는 '회화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첫 강의가 곧 열리는데 교제를 쇼핑몰 장바구니에 넣는 것만으로도 설렐 정도로 기대가 크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배움을 이어왔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 배울 것이다. 그리고 예술적 영감을 나누고, 정신적 지원자가 서로에게 되어줄 마음이 잘 맞는 동료를 꼭 얻고 싶다.
나에게 스스로 허락해 준 ‘일단멈춤’의 시간은 ‘자 잠깐만 니가 뭔갈 하면서 제일 즐거웠던 때가 언제야? 그게 하필 왜 지금 떠오른건데? 워워 세상탓, 남의탓 하지말고 그래서 지금 뭘 하면 행복하겠어? 잘 생각해봐!’라는 내면의 메세지에 귀 기울여보라는 뜻이다.
그럼 그에 대답을 해야지!!!
나라고 못할까! 지금이라고 못할까!! 그냥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