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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기덕희덕 Aug 22. 2022

의도를 포기할 것

재료의 물성 따라가기

‘세상의 모든 조물거리’ 2기의 두번째 수업의 시작을 ‘1기가 보내는 메시지’로 열었다. 그 메시지는 ‘의도를 포기할 것’이었다. 첫 시간에 통제가 되지 않는 재료를 체험했는데 대다수의 수강생들이 몹시 당황해하며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 수업은 재료의 특성을 알아보고 재료가 만나서 일어나는 효과를 그대로 수용하고 반응하며 자유로운 표현을 하도록 돕는다.


통제가 어려운 대표적인 재료로는 수채물감이 있다. 채색을 위해 물을 잘 다루는 것이 중요한데 물조절을 실패해 농담을 살리지 못하거나 붓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해 원하는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아미술에서 수채물감을 크레파스와 같은 제한재료를 함께 쓰며 사용법을 익힌다. 하지만 성인이 된 우리는 미술재료와 담을 쌓은 채 지내왔기에 학창시절 그림을 망친 기억만 가지고 있어 수채물감은 피하곤 한다. 그러나 수채물감의 고유한 특성을 살린 맛, 물맛은 한번 경험하면 끊기 어려울 정도로 매혹적이다.


알코올잉크가 만들어내는 물자국


나는 재료를 가만히 찬찬히 느낄 수 있도록 ‘의도를 포기할 것’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수채물감에 비해 움직임이 가벼워 반응이 빠른 알코올 잉크를 소개하며 그 재료의 특성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첫번째 그림은 알코올 잉크의 원액을 살펴보고, 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에탄올로 반응을 일으키고, 화지를 움직이거나 드라이로 바람을 불어넣는 외부자극을 주며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두번째 그림은‘의도를 포기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시 상기시키며 재료의 특성을 파악했으니 의도를 가진 그림을 그려봐도 좋다고 앞에 걸었던 조건을 풀었다.


수강생들의 반응을 관찰해보니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자신의 의도를 잘 살리기 위해 제한재료를 먼저 사용한 그룹, 알코올잉크의 앞선 경험으로 예상되는 반응에 자신의 의도를 실어서 표현하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번째 그룹은 제한재료를 썼음에도 제 멋대로 흐르고, 번지고, 뒤섞이는 특성에 진땀을 흘렸다. 이 중에는 엉망진창처럼 느껴져 자신의 의도를 포기한 사람과 포기하지 못한 사람이 갈렸다. 두번째 그룹은 그냥 그 모습대로 수용하고 완성하는 사람과 이미지를 확장하여 자신의 의도를 실어서 표현하는 사람으로 갈렸다.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흥미로웠다. 자신의 의도를 작업과정에서 포기한 사람들, 재료가 만들어낸 효과 그대로를 수용한 사람들의 만족도가 훨씬 높았고, 자신의 의도를 도중에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워하며 ‘의도를 포기하라’는 조건을 걸었던 첫번째 작업이 더 좋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기대를 갖지 않고, 재료의 반응, 움직임 자체를 주목하며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시각적 감각을 일깨우는 장면들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각사각, 찰랑찰랑, 사르륵 일상소음을 담은 컨텐츠인 ASMR의 소리로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고 그 우연한 효과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더 근사하게 느껴지니 초조한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을 때보다 편안하게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했기에 만족감이 높았을 것이다.


의도 안에는 자신의 욕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욕구란 단어는 폭넓은 의미를 가지는데 우리가 허하거나 초조하거나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 하는 행위들, 우리에게 가득함과 만족, 완전함의 느낌을 주리라고 상상하는 실체와 행동을 욕구라고 지칭한다.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에는 소속의 욕구, 성취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담겨있었다. 현재 수강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그 욕구를 충족함으로서 완전한 느낌을 갖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작업과정에서 느껴졌다. 통제불가능한 재료를 썼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조절불가능한 욕구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자극에 취약하고, 욕구의 크기가 다른 욕구에 비해 크고, 지금 자신의 이슈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수업은 일주일에 두 시간, 짧은 시간동안 진행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재료는 a4지, 8절 정도의 작은 화지와 드로잉재료, 물감재료 정도가 전부이다. 중년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어떤 자격을 준다거나 성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미술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놀이, 치유적인 활동으로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이길 바랄뿐이다. 미술에 대한 지식도 쌓고, 재료를 통해 표현된 작품으로 나도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근데 사람들은 자신이 늘 하던 양상대로 그 욕구를 내포한 의도를 품고 긴장을 내려놓지 않아 그 시간을 잘 누리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1기가 보내는 메시지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자신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을 때 한숨을 쉬었고,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또한 의미있겠다고 애써 받아들이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왜 그렇게 잘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결국 그는 의도를 포기했을 때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며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해보라고 권했다. 그 뒤로 재료의 물성에 집중하고, 거기에 반응되어지는 흐름을 즐기며 자유연상을 통해 이미지를 확장하는 작업에 재미를 붙였고, 자신만의 연작시리즈로 마지막 작품을 남겼다. 내가 가진 욕구를 직면하고, 작업을 통해 성찰하고, 의도를 내려놓았을 때의 드라마틱한 효과는 미술이 주는 마술과 같다. 그것이 재료에서 시작됨을 알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통찰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2기에게도 전달이 되었고, 두 작품을 통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계속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재료와의 데이트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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