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봉투 위를 지나간 새 떼

기억이라는 액수

by 슴도치

연락이 끊겼던 사람에게 청첩장이 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웃으면 보이지 않던 긴 눈매가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떠나간 인연들은 마치 철새들 같다. 가을이나 봄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쉬웠다. 점처럼 박힌 채 이동하는 새 떼. 나는 흰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점을 찍듯 내 이름을 써 내려갔다. 흰 구름에 박힌 검은 무리. 그 점과 점이 모두 날아가는 새처럼 보였다. 다 쓰고 보면 그것들의 이름까지 적은 것 같았다. 토요일에는 바쁘지 않은 나 대신 전서구 같은 봉투만 도착할 것이다. 그 봉투와 더불어 그는 다시 동쪽이나 서쪽으로 날아가겠지. 우리는 서로를 알았었다고 할까. 이제 모른다고 할까. 끊어진 인연과 이어진 시간. 우르르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예식장. 갈 곳 없는 안부만 텃새처럼 남았다. 낮에는 구름이 보이더니 밤에는 새카맣게 어두워서, 당신 닮은 새 떼가 지나가도 모를 일이었다.












가끔 청첩장을 받을 때가 있다. 잊혔던 사람이 잊히기 전에 모습을 한 채 잊히지 않으려고 나타날 때는 늘 희미한 기시감이 든다. 이 사람,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분. ‘너라는 사람이 있었지’하는 묘한 안도감과 반가움. ‘왜 하필 지금?’이라는 의문과 ‘그래서 얼마?’하는 현실적인 질문과 반감까지. 오래되고 잊혔던 우리 관계의 액수를 가늠하는 나의 마음은 그래서 늘 혼란스럽다.



잊힌 사람과의 관계가 좋았을 리 만무하다. 사실 그들 또한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이려고 다가오는 것보다, 끊어지기 전의 기억을 팔러 오는 장사꾼들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식으로 마주하는 기억도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사게 되는 물건도 있다. 그럴 때는 대부분 장사꾼의 입담이 좋거나 충동적으로 갖고 싶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떠올린 기억이 좋았다면,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도 마무리는 아름답게 하고 싶은 게 인간이다.



그런데 청첩장을 들고 오는 사람이 철천지원수는 아닐 것이다. 그는 언제고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이고, 내 기억에 남은 사람이다. 장사치도 팔 자리를 보며 온다. 그도 나와의 기억에 가능성을 두고 청첩장을 보내는 것이다. 그 가능성. 청첩장이라는 가능성. 보통 장례식은 손님을 찾아오지 않는데 결혼식은 기어코 찾아오는 이유는 뭘까? 하객이 많았으면 하는 심리도 있겠지만, 결혼식이라는 행사를,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의 시작점을 성대하게 하고 싶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 정해진 날짜에 당신을 보고 싶다.라는 게 청첩장의 의미. 나는 그의 기억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길래 청첩장을 받는 걸까. 아니면 어떤 기억이었길래 잊혔던 걸까. 나는 청첩장의 이름을 본다. 000과 000의 장녀 혹은 차남, 아들, 딸이라고 쓰여있는 괜히 낯선 이름. 훅-하고 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은 점처럼 찍힌 이름. 청첩장이다. 나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리고 이 청첩장을 시작으로 할 그의 인생에 대한 기억도 없을 것이다. 청첩장이다. 그럼, 나는 봉투를 준비한다.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의 응답은 흰 봉투가 마땅하다. 그의 기억을 저울로 잰 지폐 몇 장도 중요하다. 이 금액으로 그와 내가 깨끗이 절연할 수 있다면, 주는 것이 응당하다. 나는 봉투에 돈을 넣고 나 대신 갈 사람을 물색하고 그 편으로 봉투를 보낸다. 나는 가지 않는다. 괜히 또 다른 기억을 첨가시키고 싶지 않다. 잊혔던 그리고 앞으로 다른 기억으로 잊힐 그의 앞날에 행복만을 기원한다. 어떤 이별은 두 번하기도 하고, 흰 봉투에 편지가 아닌 지폐가 들어가 있기도 한다. 그러면 끝-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