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아무도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의미

by 슴도치

역 앞에 노인은 푯말을 든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그것은 모음이나 자음으로 된 말이었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꾸짖는 소리 같기도, 애원하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정장을 입은 말쑥한 남자가 노인을 힐끗 쳐다보았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총총 뛰며 지나갔다. 때마침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노인은 춥지도 않은 지 겉옷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왠지 노인을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문득 나 또한 누군가에게 소리친 적도, 들린 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전에 무뢰배라도 노인에게 다가가 그의 말에 대답을, 혹은 드잡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노인은 불청객처럼 존재했다. 어쩌면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마치 사람 키만 한 돌부리처럼. 지나가던 행인이 시끄럽다는 듯 귀를 막았다. 나는 막 뛰쳐나갈 것 같은 충동을 억눌렀다. 귀를 막은 그의 손을 떼고 저 소리를 들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노인은 나 따위 관객은 애초에 상관도 없다는 듯 더욱 우렁차게 외쳤다. 눈이 노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푯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어떤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할 때가 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 순간에는 나 혼자 알고 있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우기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아니, 우긴다는 말조차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원인 모를 확신을 갖고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의 정체는 사실, 아무것도 의미 없는 단어의 집합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 순간의 정의고 기준이다.



믿음. 그 주관적이고 불가역적인 단어. 어떤 사람의 믿음은 타인에게 구원이 될 수도,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나누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럽지만, 그 감정은 너무 쉽게 타인에게 강제된다. 자신의 믿음을 전파하는 이들은 주변에 수없이 많다. 종교자, 정치가, 사상가부터 탕수육에 소스를 붓냐, 찍냐를 가지고 떠드는 사람들까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믿고 싶은 것을 믿는데, 어째서 타인의 동의가 필요한 것인지. 사람들은 마치 장사꾼처럼 자신의 믿음을 팔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기꺼이 그 동의에 가담한다. 사실 스스로 믿는 자들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이 주입되길 원한다. 가만히 다른 사람의 사상과 생각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은 의외로 주변에 많이들 있다. 자유와 평등이 좋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없다? 아니다. 자신의 자유와 평등을 내어주고 안락함을 준다면 득달 같이 달려들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우리가 매일 보는 뉴스와 가십거리만 해도 경계심 없이 듣다 보면 자연스레 동화되기 십상이다. 옳고, 그르다고 믿는 것들의 근거를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을 알 수 있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한 이유는 너무나 찾기 어렵다. 믿음은 곧잘 흑백의 논리를 수렴한다. 믿음은 동지와 적을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 좋은 도구다. 내가 믿는 것을 함께 믿어주는 사람과 내가 믿는 것을 배척하는 사람의 신뢰감이 같을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있어 불확실함이란, 인정하든 말든 믿음의 가장 좋은 촉매제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국 그 말이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다.



믿음은 공감대 없이 형성되기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떠드는 건 소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사람 키만 한 돌부리처럼 서서 나를 방해한다고 해도 내게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건, 거기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역 앞에서 줄곧 떠드는 사람은 누굴 위해 떠드는가. 그는 다수를 위해 떠드는 게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외침이다. 나는 그가 떠드는 내용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맹목성. 그 자리에 서서 쉬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전파하려는 그 맹목성. 나는 언제고 뜨겁게 나에 대해 말해본 적 있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온전히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가 말하려고 애쓰는 내용의 허접함이 아니라, 그 생소한 감정과 뜨거움. 그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생생함이.


누구나 다른 존재에게 울림을 줄 수도 있다. 그 울림이란 그의 믿음이 내게 닿았다는 의미다. 그 울림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생의 한 순간, 누군가를 믿어보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의 믿음이 되어주기도 한다. 까닭 없는 절절함이 나를 흔드는 것처럼.




브런치에서 7개월, 100번째 작품입니다. 잘 쓰지 못했어도 쓰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브런치라는 역 앞에서, 때로는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고 100번의 푯말을 들어 올렸습니다.


​"나는 언제고 뜨겁게 나에 대해 말해본 적 있나."

저는 100번 뜨겁게 말했고, 그 100번의 울림에 늘 독자님들이 계셨습니다. 앞으로 100번, 그 100번의 100번도 함께 해주신다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슴도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