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자들
완전연소(Complete Combustion)란 가연물이 산소와 충분히 결합하여, 화학적으로 더 이상 산화될 수 없는 최종 산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찌꺼기가 남지 않는 완벽한 사라짐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을 붉은색으로만 여기지만 온도에 따라 불의 색도 변한다. 보통의 불은 밝은 주황색이고, 그보다 높은 온도의 산업용 가마에서는 황백색이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완전연소가 일어날 때 불은 푸른색이 된다.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이치가 엉뚱한 방향으로 번질 때가 있다.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먼
부시먼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대.
굶주린 자 영어로 헝거.
리틀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래.
해미(전종서)는 내레이터 모델로 돈을 번다. 그녀는 몸을 쓰며 돈을 버는 게 좋다고 말한다. 카드빚은 산더미고 가족과의 관계도 끊겼다.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그동안 돈을 모았고 여행을 떠나기 직전 고향 친구였던 종수(유아인)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고양이 ‘보일’을 맡긴다. 그녀의 방은 북향이라 해가 들지 않지만 한 순간 햇살이 들어올 때가 있다. 바로 남산타워에 반사된 햇볕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올 때다. 그 반사광은 햇볕이라고도, 햇볕이 아니라고도 부를 수 없는 빛이다. 종수는 그 빛을 보며 해미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금방 꺼지고 마는 약한 불빛들처럼.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본 노을 색이 변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주황색, 붉은색, 보라색, 남색으로 이어지는 아프리카의 노을은 해미가 도달하고 싶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해미에게 있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자아의 해체 과정이다.
노을은 낮(삶)이 밤(죽음)으로 넘어가는 찰나의 시간이다. 그 색들의 변화를 보며 해미는 자신이 서 있는 세상의 끝을 보았고, 그곳에서 더 이상 '리틀 헝거(배고픈 자)'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결심을 굳힌다. 그녀는 그때부터 완전연소 되길 바랐고 벤(스티븐 연)에 의해 기꺼이 제물이 되는 것을 용인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해미는 사실상 '걸어 다니는 재'였고, 그 재가 바람에 날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해미의 방에 비치던 남산타워의 반사광은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다. 그녀의 삶에는 단 한 번도 자신만의 태양이 직접 비친 적이 없다. 그녀는 늘 타인의 시선(가족), 타인의 자본(벤), 혹은 먼 곳의 탑(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을 받으며 간접적으로만 존재했다.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녀는 고통도, 가난도,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잊기 위해 벤이라는 태양에 자신을 던진다. 그녀가 벤을 만난 후 외모와 옷차림이 바뀐 것은 벤의 제물이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소멸하기 전 가장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셈이다.
종수에게 벤은 불쾌한 '개츠비'이자 질투의 대상이지만, 해미에게 벤은 완벽한 연소를 가능케 하는 산소였다. 종수와 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 해미의 모습은 외설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묶고 있던 마지막 사회적 족쇄(옷)를 던져버리고, 재가 되어 대기 중으로 흩어지려는 해방의 의식이었다. 하지만 종수는 그 숭고한 소멸의 몸짓을 '창녀'라는 세속적이고 천박한 단어로 격하시켰다.
해미에게 종수는 어린 시절, 우물에서 자신을 구해준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녀는 동그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을 구해줄 사람을 애타게 찾았고 종수의 얼굴을 보았다. 종수라는 존재는 해미에게 있어 그레이트 헝거 이상의 그레이트를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중학교 시절 종수가 해미에게 못생겼다.라고 말한 이후 해미가 성형을 하고 종수를 육체적으로 유혹하는 장면 또한 구원자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고자 하는 심리를 닮았다. 그러나 종수는 우물을 기억하지도 못했고, 끝내 해미에게 예쁘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해미를 세상에서 완전연소 시킬 애먼 점화원(벤)에게 해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뿐이다.
나를 구해줄 유일한 사람이라 믿었던 종수에게 ‘창녀’라는 모욕을 당했을 때, 해미가 발 딛고 서 있던 마지막 삶의 지지대는 무너졌다. 종수의 그 독설은 해미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벤을 향한 자신의 물질적 열등감이 엉뚱하게 터져 나온 결과이기도 하다. 벤은 해미를 자신의 ‘제물’로 대하며 우아하게 관찰하는데, 종수는 그녀를 소유하고만 싶어 했다. 벤의 세련된 여유 앞에서 초라해진 종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해미의 자유(춤)를 ‘창녀 같다’는 말로 오염시켰다. 해미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대꾸 없이 벤의 차를 타고 떠난다. 창녀 같다고 말하는 종수의 세상(현실)보다, 차라리 자신을 화장化粧 해주고, 화장火葬 시켜주는 벤의 세상(허상, 연소)이 더 안온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녀는 애초부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의미가 없다는 진실에 도달해 스스로를 소멸시키려 했던 가녀린 불꽃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냥 이것저것 해요
얘기해도 모르실 건데,
간단히 말하면 그냥 노는 거예요.
여기서 베이스가 느껴져요.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나는 판단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그것들이 태워지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건 비 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강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해?
거기에 옳고 그른 건 없어요.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존재’ 같은 거예요.
벤은 주황색의 너울거리는 감정의 불꽃이 아니다. 공장에서 철을 녹이는 산소 용접기처럼, 소리 없이 모든 것을 증발시키는 초고온의 황백색 불꽃이다. 그가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언급한 'DNA가 다르다'는 말은 그가 느끼는 선천적인 '종(種)의 차이'를 의미한다. 그는 자신을 종수와 해미 같은 인간들과 동일한 선상에 두지 않는다. 그에게 실존의 증거는 가슴을 울리는 베이스 소리(파괴의 진동)뿐이다. 그 외의 모든 일상은 그저 견뎌야 할 지루한 연극이며, 하품은 그가 인간 세계의 도덕과 규범에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모욕적인 증거다.
벤은 여성을 죽이기 전 정성스럽게 화장을 해준다. 이것은 그들을 예쁘게 꾸며주는 선의가 아니라, 비닐하우스를 태우기 전 기름을 붓는 행위와 같다. 일종의 의식을 행하기 위한 준비과정. 벤에게 타인은 함께 살아가야 할 인격이 아니라 때가 되면 먹어 치워야 할 자연의 소출이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과정은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그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교한 자연의 순환 처리 과정이다.
벤이 생전 처음 느낀 ‘질투’의 대상이 종수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치정의 질투가 아니라 서사의 주도권에 대한 질투다. 벤은 자신이 해미라는 쓸모없고 지저분한 존재를 소멸시켜 허무로부터 해방해 주는 유일한 신(구원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해미의 기억 속에 우물에서 나를 구해준 ‘종수’라는 또 다른 구원 서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쾌해진다.
자신이 집행하는 ‘연소’가 해미에게 유일한 구원이 아니라는, 즉 종수라는 다른 대안이 그녀의 영혼에 깊이 박혀 있다는 사실이 벤의 전능함에 균열을 냈다. 그래서 그는 보란 듯이 해미를 연소시킴으로써 종수의 구원의 서사 또한 파괴했다.
벤이 영화 내내 종수를 흥미롭게 여기고, 그에게 자신이 숨겨야 하는 살인의 비밀을 비닐하우스라는 메타포로 설명한 이유는 벤에게 있어 종수가 단순히 해미의 고향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지루한 신격(神格) 유희를 이해하고 기록해 줄 자격 있는 관객이었기 때문이다.
벤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지만,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 줄 지성적 이해는 사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메타포를 설명할 수 있는, 소설 쓰는 작가 ‘종수’라는 존재는 흥미로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벤은 종수를 자신과 같은 창작자라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은 현실을 재료로 살인(연소)이라는 예술을 하고, 종수는 활자로 해미라는 ‘서사’를 기록한다.
벤이 “내 이야기를 종수 씨에게 해주고 싶었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범죄를 알아봐 줄 단 한 사람의 비평가를 찾았다는 희열의 표현이다. 작가만이 메타포의 무게를 견디고 그 이면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연쇄살인범이 자신을 찾으라고 경찰서나 신문사에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는 일과 같다. 벤은 종수에게 자신의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종수를 평범한 구경꾼의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자신과 같은 시점으로 끌어올린다.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고 예고함으로써, 종수를 ‘미필적 고의’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지키지 못하거나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수의 무능이자 방조가 된다. 벤은 종수의 양심에 ‘그을음’을 묻힘으로써, 종수가 더 이상 벤을 비난할 수 없는 위치(심리적 공범)에 서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후 온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는 종수의 행동과 연관이 있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 찾아보라는 말은 명백한 선전포고처럼 들린다. 이는 완전연소를 행하는 자가 내뱉는 오만함의 극치이자 도발이다. 벤은 종수에게 범행을 예고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위장한다.
벤은 스스로를 자연의 섭리를 집행하는 신적인 존재로 여긴다. 그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는 단순한 방화가 아니라, 세상에 쓸모없어진 존재를 정화하는 종교적 의식에 가깝다. 고대 제사에서 제물을 바치기 전 깨끗이 씻기고 꾸미듯, 벤은 자신이 연소시킬 대상에게 최후의 화장化粧을 해준다. 이는 그녀들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버닝(Burning) 축제’에 올릴 완벽한 작품으로 다듬는 과정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노을처럼, 그녀들이 사라지기 직전 가장 화려한 색채를 입히길 원한다. 그에게 죽음은 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세련되게 연출되어야 할 ‘미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성들은 고유한 서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지루함을 달래줄 살아있는 비닐하우스다. 그러므로 화장을 해주는 행위는 상대의 본래 얼굴(자아)을 지우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권능)를 덮어씌우는 지배 행위다. 화장이 진해질수록 그녀의 실제 고통이나 삶의 궤적은 가려지고, 벤이 규정한 사라져야 할 것으로 고착된다. 벤의 서랍 속에 가득했던 여자들의 장신구처럼, 화장은 그가 소유하고 파괴할 '오브제'를 분류하는 일종의 라벨링(Labeling) 작업이기도 하다.
벤과 친구들에게 타인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다. 벤이 해미와 연주(김수경)를 친구들 앞에 진열하는 건 ‘내가 이런 독특하고 비루한(신비한) 존재를 발견했다’는 수집가로서의 자랑이다. 친구들이 해미의 춤과 연주의 이야기에 미소 짓는 건 호의가 아니라, 비싼 작품의 기묘한 작동을 구경하는 원초적 흥미일 뿐이다. 그들은 해미와 연주가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는다. 또 다른 전시물을 관람하면 되기 때문이다. 벤은 그들의 그 지독한 무심함을 확인하며 자신의 범죄가 사회적으로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자신이 곧 소멸시킬 존재를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세워두는 행위는 벤에게 엄청난 전능감을 준다. 그것은 ‘지금 너희 눈앞에 있는 이 생명을 곧 지워버릴 것이지만, 너희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라는 비밀스러운 우월감이다. 벤에게 화장이 '단장'이었다면, 전시는 '공표'다. 그는 해미라는 작품을 사회라는 캔버스에 잠시 올려두었다가, 전시기한이 끝나는 순간 찢어버린다.
벤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사회적 가부(可否)를 묻는다. 자신의 친구들이 해미를 보면서도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벤은 “이 여자는 사라져도 세상이 눈치채지 못하겠구나”라는 살인 면허를 획득한다. 친구들의 건조한 반응 또한 우리는 이런 부류와 섞일 수 없는 우월한 ‘종(DNA)’이라는 그들끼리의 동질감을 공고히 한다. 그들의 방관은 벤에게 있어 이 비닐하우스는 태워도 좋다는 신들의 묵시적인 승인이다.
벤은 종수가 보란 듯이 해미라는 가장 가까운 비닐하우스를 태웠다. 종수가 미친 듯이 비닐하우스를 확인하러 다니는 동안, 벤은 종수의 절망을 감상하며 자신의 '버닝'이 성공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해미가 믿었던 구원자(종수) 앞에서 그녀를 '연소'시킴으로, 종수라는 질투감 서린 서사를 무너뜨리고 전능한 신이라는 자신의 서사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벤을 향한 종수의 집착과 비닐하우스를 찾아 헤매는 몸부림은 벤에게 전리품과 같다. 벤의 행위에서 '옳고 그름'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는 도덕이 거세된 순수한 자연의 폭력성 그 자체다. 벤이라는 기상 현상 앞에서 종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젖은 몸으로 비닐하우스를 찾아 달리는 일뿐이다.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왜요?
저한테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종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구원’하려 하지만, 그 시도는 매번 실패한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정교하게 써 내려간 탄원서는 아버지의 고집과 법정의 냉기 속에 증발하고, 해미를 구하고 싶다는 갈망은 그녀에 대한 무력감과 ‘창녀 같다’는 비겁한 독설 뒤로 사라진다.
구원이라는 행위는 구원받을 대상이 확고할 때 성립한다. 하지만 종수의 우주에서는 대상이 안개처럼 흩어지기에, 그가 손을 뻗는 행위는 늘 허공을 가를 뿐이다. 그는 구원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방관자에 가깝다. 생계를 위한 직업도,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 미등단 소설가로서 지위도 모든 지표가 그의 실패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 실패가 예견되어 있었던 것은 그가 구하려 했던 것들이 실체가 없는 팬터마임이었기 때문이다.
종수의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파주의 산골, 북의 대남방송 소리는 들리지만 적은 안개 너머의 위협일 뿐 와닿지 않는다. 고양이 ‘보일’과 우물 또한 없다는 걸 잊어야 하는 혹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좌표들이다. 벤이 태웠다고 하는 비닐하우스 또한 마찬가지다. 종수는 불타버린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니지만, 확인할 수 없는 연소된 자국은 종수를 더욱 실패하게 만든다.
영화 속 종수는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두 가지의 상황을 보여준다.
벤에게 비닐하우스의 고백을 듣고 종수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옅게 미소 짓는 꿈을 꾼다. 어린 시절 종수에게 불은 공포이자 상실이었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집 나간 어머니의 옷가지들을 태우라고 종수에게 시킬 때, 그는 불길 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벤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본 불타는 비닐하우스 앞에서 어린 종수의 미소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 것이 아니라 그 파괴적인 힘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불꽃 앞에서 종수는 벤이 느꼈던 그 기묘한 해방감을 공유하게 된다. 그 미소는 일종의 살인마의 입문식과 같다. 종수는 벤이 말한 메타포의 세계로 완전히 진입한다. 그동안 실체가 없어 방황하던 종수에게 처음으로 실체가 있는 폭력과 파괴의 희열을 마주한 순간의 미소다.
사라진 해미의 행적을 찾기 위해 벤을 미행하던 종수가 오히려 벤에게 쫓기다 산 위에 호수 앞에서 그를 다시 훔쳐보게 된다. 벤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그 장면은 관찰자의 무력감과 다가갈 수 없는 계급적 차이가 가장 서늘하게 맞닿은 순간이다.
해미가 빠졌던 곳은 작고 좁은 마른 우물이었다. 하지만 벤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하고 깊은 호수다. 종수는 해미를 구하기 위해 수직의 우물을 내려다봐야 했지만, 벤은 압도적인 수평의 호수를 지배하듯 바라보고 있다. 마른 우물조차 기억해 내기 버거웠던 종수에게, 벤이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수량(水量)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계급적·존재론적 격차로 볼 수 있다.
종수가 벤을 미행하다가 역으로 쫓기는 상황은, 종수가 결코 벤의 서사를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종수는 벤을 '범인'으로 규정하고 쫓았지만, 결국 벤에게 쫓겨 숨는다. 벤이 호수 앞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것은 종수에게 들킨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벤이 바라보는 호수는 해미가 연소된 결과물이 처리되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종수가 목격한 벤의 뒷모습은 제를 마친 사제가 제단을 정리하고 명상에 잠긴 듯한 고요함을 준다. 불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깊은 물은 실체를 숨긴다. 종수는 벤의 뒷모습을 보며 해미가 저 깊은 물아래로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세상에는 오직 불을 붙이는 재미와 두 달간의 권태로움만이 남았다. 그는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동시에 존재할 뿐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집행할 뿐이다. 그가 비닐하우스(혹은 여성들)를 태우는 행위는, 자신의 무감각한 영혼에 아주 잠깐의 베이스(존재의 떨림)를 선사하는 타락한 제사 의식이다.
종수는 처음엔 신의 피조물처럼 벤의 뒤를 쫓는다. 벤이 던진 모호한 힌트(계시)를 해석하느라 괴로움에 시달린다. 벤이 연소라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면, 종수는 연소의 서사를 부여하려 애쓴다. 그것은 해미가 남긴 유산, 그레이트 헝거를 기리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종수가 벤을 연소시키는 행위는 벤이 제안한 메타포를 물리적 실체로 치환해 버리는 강력한 실행이다. 벤을 태움으로써 종수는 비로소 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직접 주관하는 창조신의 권좌에 오른다. 그 대가가 알몸(모든 것의 상실)일지라도 말이다.
실체가 없는 세상에서 실체 없는 존재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종수는 존재하지 않는 귤을 까먹는 해미의 팬터마임처럼, 존재하지 않는 구원을 연기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경로를 써내려 갔는지도 모른다. 벤이 정말 해미를 살해했는지, 종수가 벤을 살해한 것이 소설 속의 내용인지 아니 종수 자체가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인지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은 채 종수의 세계는 파랗게 연소된다.
종수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칼(폭력)을 집어 들고 자신을 압도하던 신(벤)을 무너뜨리지만, 자신 또한 연소될 준비를 마친다. 벤의 불꽃이 모든 것을 삼키는 황백색의 탐욕이었다면, 종수의 연소는 가장 뜨거우면서도 서늘한 파란색의 불꽃이다. 해미는 타인을 통해서만 연소되고, 벤은 스스로 타오를 의지가 없었지만, 종수는 자신의 의지대로 타오른다. 그것이 실제의 살인인지, 혹은 해미의 방에서 써 내려간 소설의 결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가 비로소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방관자에서 불꽃으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이다.
종수가 알몸으로 트럭에 올라타 떠날 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여전히 수수께끼였을까. 아니면 비로소 모든 실체가 타버린 선명한 폐허였을까. 어떤 해답이라도 듣고 싶지만, 불이 붙은 곳은 조용히 타들어 갈 뿐이다. 마치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