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력과 내력, 그 버팀의 과정
복개천 위에 지어 가지고 재건축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아.
나도 터를 잘못 잡았어.
지구에 태어나는 게 아닌데.
박동훈(이선균)은 자신을 ‘터를 잘못 잡아 지어진 건물’로 정의한다. 박동훈의 비극은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선량함의 에너지가 ‘후계(後界)’라는 닫힌 성벽 안으로만 역류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겉으로는 대기업 부장, 아내 윤희(이지아)와 단란한 가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시선과 관심은 모두 후계의 몰락한 형제, 연로한 어머니, 나이 들고 실패한 지인들에게로 가 있다. 터를 잘못 잡았다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 또한 밝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면 하는 가보지 못한 가능성에 대한 애이불비哀而不悲다.
박동훈의 세계는 후계동의 경계선 안에서 멈춘다. 그에게 후계동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지탱하는 구조적 지반, 그 자체다. 이곳에는 실패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박동훈은 그들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들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한다. 그가 그들을 구원하려 할수록, 성벽은 더욱 견고해지고 외부인(윤희)이 들어올 틈은 사라진다. 그것은 동훈이 윤희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윤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불행에서 조금 더 멀리 옮겨놓고 싶어서다. 그의 아들이 조기유학을 가게 된 것 또한 비슷한 의미다. 후계동이라는 잘못된 터에 지어진 건물은 자신 하나만으로 충분하니까.
당신 단 한 사람 얻겠다고
당신이 좋아하는 어머님, 아주버님, 도련님
심지어 정희 언니한테까지도 잘했어.
그래도 단 한 번만이라도 당신 전적으로 내 편이었던 적 없었어.
난 이 동네가 싫어
당신 주변에 바글바글 대는 사람들 다 싫어.
동훈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후계와 가정을 양분하여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시도였다. 후계동의 집은 변변치 않은 형제들과 그 형제들로 인해 마음 쓰는 노모가 있는 전장이고, 동훈의 집은 가족의 안식처가 아니라 후계라는 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셸터(shelter)다. 윤희가 느꼈을 소외감은 단순한 불륜의 변명이 아니라 철저히 고립된 이방인의 절규다. 그녀는 동훈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했지만, 옹벽은 한쪽만 소유할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니다. 어쩌면 동훈은 불행하고 결핍되지 않은 사람은 애정할 수 없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사랑할 불행이, 불행히도 윤희에게 없었다.
박동훈이라는 옹벽을 지배하는 설계 원칙은 어머니 변요순(고두심)이다. 그녀로 인해 박동훈은 후계동의 파수꾼이 된다. 극 중 초반 박동훈이 5천만 원 뇌물을 서랍에 넣어둔 것 또한 어머니가 말한 형의 가게 보증금 때문이었다. 이처럼 동훈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도 변요순 때문이고, 그가 후계에서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변요순이 정해놓은 세계관에서 ‘이혼’은 건물의 붕괴를 의미한다. 동훈은 아내와의 사랑이 끝났음을 직감하면서도, 어머니라는 ‘절대적인 수직 하중’을 견디기 위해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그 희생의 비용을 아내인 윤희에게 전가했다. 윤희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설계도 위에서, 부부의 불행은 건물을 지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구조적 결함’이었다. 변요순이 속으로 윤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또한 자신의 설계해 놓은 세계 안에 윤희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희는 후계동이라는 성벽 밖에 자리 잡고 동훈이 돌아와 주길 기다렸고, 동훈은 끝끝내 온전히 돌아가지 못했다.
박동훈은 터를 잘못 잡았기에, 그 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내력을 소진한다. 그는 후계동이라는 낡은 지반 위에 세워져 후계동을 지키는 옹벽이었다. 그러나 그 옹벽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니었고 그는 무너져가는 형제들을 떠받치느라 정작 자신의 지붕 아래 있는 가족을 멀리 보내놓으려고(아들의 유학, 아내의 불륜) 준비한 사람이다. 박동훈의 불행은 ‘선량함의 역설’에서 기인한다. 그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정작 가까운 이에게는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옹벽의 숙명은 뒤편의 토압(외력)을 견뎌내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적으로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고 전이된다. 박동훈이 밖으로 내뱉지 못한 인간성(불평과 눈물)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부 응력으로 쌓여 그를 마음 편히 불평을 하거나 울 수도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의 내력은 강함이 아니라 ‘인내’라는 이름의 비극적 밀도에 가깝다.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름대로 살아
좋은 이름 두고 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동훈에게 자기 최면 같은 말이 아니라, 외부에서 몰아치는 거대한 외력이 구조물의 임계치를 넘지 않도록 분산시키고 무력화하는 박동훈만의 내진 설계 도면에 쓰인 말이다. 구조공학에서 가장 안정적인 상태는 모든 힘의 합이 '0'이 되는 상태다. 옹벽인 동훈에게 쏟아지는 토압(형제의 몰락, 아내의 외도, 직장의 음모)은 그를 무너뜨리려는 거대한 수치가 된다. 동훈은 그 수치들을 하나하나 계산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그것에 외력을 상쇄하는 0(Zero). 즉,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값을 대입한다. 외력이 아무리 강해도 내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내력이 거부하면), 그 힘은 구조체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고 흩어진다. 이는 울 수도 불평할 수도 없는 옹벽이 선택한 최후의 생존 전략이자 박동훈만의 고독한 신념이다.
그러나 동훈의 신념은 역설적으로 그를 가장 아프게 만든다.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죽여야 했다. 요순과 형제들이 동훈을 가타부타 말이 없는 존재로 묘사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지안(이지은/아이유)이 “아저씨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며 울어줄 때, 동훈은 비로소 외력을 버티는 것보다 내부의 응력을 함께 나눠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0년 후든 20년 후든
길에서 너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아는 체할 거야.
너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네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나 이제 죽었다 깨나도 행복해야겠다.
너, 나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거 못 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 살겠다.
너처럼 어린애가 어떻게,
어떻게 나 같은 어른이 불쌍해서
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 살겠다.
박동훈이라는 인물의 내면에서 후계는 지구와는 전혀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또 다른 세계다. 그가 뱉은 이 절절한 고백의 대사는 단순한 연민을 넘어, 세계의 붕괴를 막아낸 행성 거주자들의 상호 구원 조약과도 같다.
“반갑게 아는 체할 거야”라는 말은 평범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그것은 너를 내 세계(후계)에서 탈락시키지 않겠다는 옹벽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동훈에게 후계동은 실패한 이들이 모여 서로의 등을 비비는 온기로 유지되는 행성이다. 이곳에서 누군가가 행방불명되거나 완전히 망가지는 것은 행성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이다. 그것은 행성의 고독한 통치자인 동훈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도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상태, 즉 부끄럽지 않게 살아남은 상태로 너를 두겠다는 약속은, 지안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인생에 닥칠 또 다른 '외력(불행)'으로 기록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내력을 확장시키겠다는 선언이다.
동훈은 지안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불쌍해서’라고 단언한다. 이는 그들이 서로 같은 종으로 공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서로의 불쌍함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 서로의 고통을 객관화한다. 동훈은 지안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통치자였는지를 직시한다. 자신의 마음을 지안이 다 알고 있을 것 같다던 동훈의 말은 본인이 쓰고 있던 후계의 왕관을 쓸 자격이 지안에게 있다는 걸 암시한다. 그 왕관은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서로의 불쌍함을 알아본 자들의 증명이다.
작은 가건물의 아이 지안이, 거대한 옹벽인 자신의 균열을 걱정하며 울어줄 때 동훈의 내력은 역설적으로 가장 크게 요동친다. 그 미안함은 어른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동훈은 후계의 후계자인 지안을 위해 다시 움직일 동력을 얻게 된다.
“나 이제 죽었다 깨나도 행복해야겠다”는 말은 박동훈 인생에서 가장 능동적인 결단이다. 이전에는 내력과 버티기에 집중했다면, 저 말을 하는 시점부터 동훈은 행복을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불행하면 나를 불쌍히 여긴 지안의 마음도 영원히 불쌍함으로 남을 것을 알기에, 그는 지안을 위해서라도 행복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아야만 한다. 그가 행복해야 지안도 후계라는 중력을 이탈하지 않고 평안(至安)에 머물 수 있다. “내가 행복해야 당신이 덜 불쌍하다”는 이 서글픈 인과관계는 “우리 행복하자”로 귀결되는 동훈과 지안의 이유가 된다.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상처 입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걔의 지난날들을 알기가 겁난다.
지안에게 동훈은 단순한 연애의 대상이 아니라, 무법지대 같던 그녀의 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어른이라는 이름의 '한동네 사람'이었다. 지안의 세계에서 모든 어른은 늑대이거나 사냥꾼이다. 그녀는 살기 위해 자신을 언제든 버리고 도망갈 수 있는 가건물로 건설해야 했다. 지안에게 호의란 늘 대가가 따르는 '부채'다. 하지만 동훈이 건넨 말 한마디, 밥 한 끼라는 무취無臭의 호의는 자꾸만 그녀의 경계심을 고장 냈다.
지안은 동훈을 통해 어른이 가야 할 방향을 목격한다. 그것은 남을 밟고 일어서는 법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도 묵묵히 버티는 옹벽의 모습이었다. 지안이 이어폰을 끼고 동훈의 일상을 듣는 행위는 일방향이다.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는 상태. 그것은 일종의 학생이 선생님을 통해 듣는 주입식 교육과도 닮았다. 지안은 동훈의 숨소리를 통해 그가 외부의 압력(외력)을 어떻게 견디는지, 무너지고 싶을 때 어떻게 자신을 지탱하는지(내력)를 실시간으로 배운다.
지안에게 이어폰 너머의 소리는 소음이 아니라 자신이 닿고자 하는 삶의 소리였다. 그녀는 동훈의 고단한 발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배웠고, 동훈의 한숨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흔들리는 구조물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가장 효과적인 인생 강의였다.
사실, 지안이 동훈에게 느낀 감정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부정(父親)'에 가깝다. 그녀가 그를 부장님이 아닌 아저씨라고 부르는 대목 또한 이를 증명한다. 지안은 동훈처럼 되고 싶어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 또한 동훈처럼 비바람을 막아주는 옹벽이 될 수 있을지, 자신도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지 기대하게 되었다.
지안에게 동훈의 행복은 자신의 존재 증명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배운 유일한 어른인 동훈이 무너지면, 자신의 미래도 무너질 거라는 절박함이 지안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훈이 행복해지기를 그토록 바랐다. 동훈이 행복해져야만, 가건물 같던 자신도 언젠가 반듯한 집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것만큼 서로가 행복해야 될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 다 자기가 불쌍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싫어요 지겨워
맨날 똑같은 계절 반복해 가면서.
21살짜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21살이기만 할까, 한 번만 태어났으려고.
매 생에 60살씩 살았다 치고 5백번쯤 환생했다 치면
한 3천살쯤 되려나
3만.
오, 3만. 왜 자꾸 태어나는 걸까.
두 사람이 서로를 불쌍히 여긴 이유는 단순한 감상주의가 아니라 서로의 균열을 유일하게 읽어낸 동향同鄕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구조기술사인 동훈의 눈에 지안은 기초 공사도 없이 삭풍이 몰아치는 벼랑 끝에 세워진 가건물이다. 마치 후계 행성의 모든 비극을 압축해 놓은 결정체처럼 말이다.
지안이 짊어진 빚, 할머니라는 책임, 그리고 살인이라는 과거는 동훈이 평생 버텨온 성실한 옹벽의 무게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지안을 불쌍해하는 마음은 사실 후계라는 터를 벗어나지 못해 마모되어 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다. 동훈에게 지안을 구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지안이 동훈을 불쌍히 여긴 이유는, 그가 한 달에 오백이나 버는 가장 완벽해 보이는 자리(대기업 부장)에서 가장 처절하게 붕괴하고 있는 인간임을 도청(교육방송)을 통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남들이 동훈을 바라보는 단단한 외벽이 내부의 철근부터 산화되어 부서지는 소리를 지안은 유일하게 알아챈다. 동훈은 가족과 후계를 위해 자신을 갈아 넣어 옹벽이 되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다. 지안은 3만 살의 지혜로 그것을 꿰뚫어 본다.
결국 두 사람이 서로를 불쌍히 여긴 이유는 연민만이 서로의 폐쇄된 세계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기 때문이다. 지안에게 어른은 이용 대상이었고 동훈에게 삶은 버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순간, 이용과 버팀이라는 '외력'은 사라지고 함께 생존하겠다는 내력만 남는다. 두 후계인이 서로를 불쌍해했던 이유는, 그것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가라.
내일 봬요. 파이팅!
박동훈이라는 옹벽은 평생 수많은 외력을 견뎌왔지만, 정작 그 벽을 보강해 주는 존재는 없었다. 지안의 “파이팅”은 옹벽의 앞면에 처음으로 가해진 철근의 보강작업과 같다. 3만 년의 피로를 짊어진 아이가, 자신도 버거운 그 생의 에너지를 쪼개어 동훈을 응원했을 때, 동훈의 내부 응력은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한다.
평생 나를 지키기 위해 어른에게 도망쳤던 지안이, 처음으로 어른의 안녕을 위해 응원을 보낸 순간, 지안은 후계 행성의 차가운 이방인에서 동훈의 뒤를 잇는 ‘정서적 후계자’로 거듭난다. 지안은 동훈에게 “파이팅”을 외침으로써, 동훈이 자신을 구원한 것처럼 자신도 동훈을 구원할 수 있다는 권능을 얻게 된다.
착하다.
동훈이 할머니를 모시며 힘들게 사는 지안에게 건넨 ‘착하다’라는 한 마디는 지안에게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안의 망가진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든 서사적 충격이자, 그녀가 평생을 걸쳐 찾아 헤맸던 자기 증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스스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오류라고 믿었다. 그런데 동훈이 그녀의 비참함을 ‘착함’으로 정의해 버렸을 때, 그녀는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짊어진 살인의 고통이, 남을 해치려는 악의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려는 숭고한 헌신이었음을 어른인 동훈에게 증명받는다. 이 발견은 지안이 세상에 던졌던 모든 날 선 방어기제를 무력화시킨다. 옹벽(동훈)이 가건물(지안)에게 준 것은 돈이나 밥이 아니라, 지안의 악의를 선의로 바꿔주는 강력한 내력(耐力)이었다.
미안하다.
아저씨가 왜요?
처음이었는데 네 번 이상 잘해준 사람
나 같은 사람.
내가 좋아한 사람.
나 이제 다시 태어난대도 상관없어요.
또 태어날 수 있어.
괜찮아요.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건가?
응
무시 천대에 익숙해져서 사람들한테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고
인정받으려고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근데 이젠 잘하고 싶어졌습니다.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
지안은 박동훈에게 단순한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후계동의 정서적 본질 그 자체다. 동훈은 성공한 변호사 아내보다, 지안에게서 더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지안이 “이 동네가 너무 좋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동훈의 세계 안으로 완벽하게 편입된다.
동훈이 지안을 구원하려 애쓰는 행위는, 사실 후계동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다. 지안은 동훈이 가진 후계에 대한 애착이라는 저주를 정당화해 주는 가장 강력한 명분이 된다.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었나 보다.
다 죽어가는 나. 살려 놓은 게 너야.
난 아저씨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데.
이제 진짜 행복하자.
박동훈은 평생 가족의 붕괴를 막기 위해 스스로를 콘크리트 속에 가두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후계의 현신과도 같은 지안의 응원은 자신이 지키던 후계에게 듣는 찬사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는 수직하중을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나란히 앉은 지안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수평의 인간이 되었다. 지안을 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 그 과정에서 살아난 것은 박동훈 자신이었음을 지안에게 담담히 고백한다. 타인을 위해 버티던 그가 스스로를 위해 숨 쉬는 인간으로 결단한 순간 그는 다시 재생되었다.
지안에게 세상은 언제나 철거 예정지였고, 자신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가건물이었다. 하지만 동훈이라는 단단한 내력을 이식받은 후,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생을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바라본다. “나 이제 다시 태어난대도 상관없어요”라는 말은, 삶이라는 지옥의 반복을 거부하던 아이가 비로소 삶의 뿌리 내렸음을 뜻한다.
21년, 혹은 3만 년을 버텨왔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오직 동훈이라는 어른의 호의를 통해, 그녀는 비로소 잘해보고 싶어졌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살던 들고양이 같은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단지 생존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으로서.
이 말은 두 후계인이 서로의 영혼에 찍은 최종 승인 도장이다. 여기서 행복은 개인의 즐거움이 아니라, 나를 살려준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뜻한다. 나의 행복이 곧 당신의 행복이라는 말. 당신의 행복을 담보 삼아 나도 행복하겠다는 말. 그것은 내가 행복해야만 나를 구원한 당신의 서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10년 뒤 우연히 만나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은 두 사람이 각자의 터에서 훌륭한 건축물로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가 될 것이다. 그들은 후계라는 행성에 편안함(至安)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동네를 건설했다.
동훈이 너 어떻게든 회사에 꼭 붙어있어야 된다.
불쌍한 우리 엄마 장례식에 화한이라도 제대로 박혀있고
쪽팔리지 않을 만큼 문상객 채우려면
어떻게든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회사에 꼭 붙어있어야 돼.
못 봤겠지 못 본 거겠지.
그냥 도시락만 두고 간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집에 갔는데
노인네가 날 보고 웃어.
다 본 거야.
전요. 제 동생이, 동훈이가 이 얘기를 아무한테도 안 했다는 게 자기 혼자만 마음 아파했다는 게 그게 너무 슬픕니다.
근데 그건 동훈이가 제수씨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거죠.
우리 동훈이가 그런 놈입니다.
상훈(박호산)은 비록 낡고 비가 새며 여기저기 뒤틀린 목재들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향한 가장 뜨겁고도 축축한 온기가 흐르고 있다. 상훈에게 장례식의 화환과 문상객은 단순히 체면의 문제가 아니다. 복도를 가득 채울 화한은 자신의 비루한 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줄 인생의 최종 정산서이다.
상훈은 형제들 중 이상향이 가장 높다. 장남이며 대기업을 다녔고, 번듯한 가정을 꿈꿨던 그에게 해고와 파산은 건물의 기초가 뽑혀 나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상훈은 자신이 형제들을 위해 울어준 만큼, 세상도 자신(혹은 어머니)의 마지막에 와서 울어주길 바란다. 그 눈물과 슬픔이야말로 그동안의 외력(실패)을 보상해 줄 내력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문상객들은 낡은 목조건물인 상훈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외부 지지대인 셈이다.
박동훈이 외력을 막아내는 ‘벽’이라면, 박상훈은 외력을 몸으로 받아내며 삐걱거리는 나무 기둥이다. 목조건물은 콘크리트보다 유연하다. 상훈은 형제들의 불행을 보면 가장 먼저 달려가 울음을 터뜨린다. 기훈이 ‘내가 싫다가도 좋다’고 말할 때, 상훈은 자신이 '늘 좋다'고 말한다. 그 높은 자기애 또한 낡은 건물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수비용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타인의 슬픔을 대신 울어줄 수 있는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재는 불에 타기 쉽다. 동생 동훈의 불행(윤희의 외도)을 알았을 때, 상훈이 느낀 슬픔은 옹벽에 생긴 균열보다 훨씬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동훈의 불행을 자신의 책임으로 일치시킨다. 그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자신이 잘 나갔으면 동훈의 불륜조차 없었을 거라는 무한한 내 탓이다. 그는 동훈의 불행보다 그 불행을 혼자 견뎠을 동생을 위해 윤희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그 슬픔조차 동생의 사랑일 거라며 위로한다. 마치 오래된 목조건물의 무해함처럼.
상훈은 후계라는 행성에서 가장 인간적인 온도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그가 지안의 할머니 장례식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비상금'을 털어 화환을 채우고 문상객을 부른 행위는, 자신의 이상향을 완성하는 완공식이다. 그는 후계의 현신인 지안을 연대해 앞장선다.
“우리 동훈이가 그런 놈입니다”라며 동생의 상처를 덮어주려 애쓰는 모습은, 낡은 목재가 썩어가면서도 지붕을 떠받치는 헌신과 같다. 그는 비록 사회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형제’라는 구조물 안에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핵심 재료다.
박상훈은 자신의 비루함을 타인의 슬픔을 닦아주는 후계라는 행성의 가장 슬픈 낙천주의자다. 그는 비바람에 뒤틀린 오래된 목조건물이지만, 그 마음에는 형제들의 슬픔을 안아줄 수 있는 대청마루가 있다. 그는 화환이라는 영수증을 꿈꿨지만, 결국 타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이별의 순간, 가장 커다란 꽃바구니가 되어준 인물이다.
그냥 잘 날려 보내야지.
영화관에서 큰 화면으로 널 보면
되게 쓸쓸할 것 같은데
그래도 좋을 것 같아.
여기서 이렇게 살아도
내 인생이 영화 같을 것 같아.
천재이고 싶었어.
천재로 남고 싶었어.
다시는 영화 못 찍고 굶어 죽어도
천재로 남고 싶었어.
그래서 네 탓하기로 한 거야.
박동훈이라는 옹벽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박상훈이라는 목조건물이 세월을 머금으며 살아간다면, 박기훈은 가변적이고 불안전하다. 그는 언제든 해체되어 트럭에 실려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위태롭고 가벼운 외피를 가졌다.
조립식 건물은 공사 기간이 짧고 겉보기에는 현대적이지만, 내부의 밀도는 낮다. 기훈은 자신의 평범함을 견디지 못해 ‘천재’라는 화려한 설계도를 외벽에 붙여놓았다. 그러나 재능의 한계를 마주했을 때 스스로를 해체하는 길을 택했다. 유라(권나라)를 향해 ‘네 탓을 했다’는 고백은, 완공하지 못한 건물의 결함을 지반(유라) 탓으로 돌리며 도망친 건축가의 비겁한 자백이다.
기훈은 옹벽처럼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외부의 충격이 오면 샌드위치 판넬이 떨리듯 즉각적으로 비명(화)을 내지른다. 동훈이 옹벽의 침묵으로, 상훈이 슬픔을 안으로 삭여 목재를 적신다면, 기훈은 그 슬픔을 분노로 치환해 밖으로 튕겨낸다.
최유라는 기훈이 무너뜨린 최초의 구조물이자, 그의 실패를 정당화해 준 유일한 목격자이다. 기훈은 유라의 망함 통해 위안을 얻었고 유라는 기훈의 망함으로 위안 받는다. 그 둘이 서로의 망함을 통해 자위하는 장면은, 조립식 건물이 또 다른 조립식 건물을 만나 서로의 부품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과정과 같다. 후계 행성에서 가장 기묘하고도 서글픈 연애의 방식이다.
유라와 기훈의 이별은 조립식 건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훈을 향한 유라의 안타까움 때문이다. 유라는 자신의 공포심을 이겨내고 극장의 스크린에 나온다. 그리고 기훈 또한 다시 대본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조립식 건물이 아닌 영구 구조물이 되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천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깨달음은, 조립식 건물이 비로소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타설 하는 기초 공사를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태어난대도 상관없다는 지안의 말처럼, 기훈도 실패한 감독이라는 낡은 부품을 버리고 실패할 수도 있는 감독이라는 새 부품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남 탓을 하며 건물을 부수는 자가 아니라, 비루한 일상(청소)의 자재들을 모아 영화라는 집을 짓는 진짜 건축가로 재조립되기로 한다. ‘그랜드 캐년(유라)이 돌아왔다’는 글의 서두로 보아 그의 작품이 후계를 기점으로 시작된다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다.
너 불쌍해.
아주 많이 불쌍해.
너 같은 놈을 좋아했다는 게 너무 쪽팔려.
죽고 싶게 쪽팔려.
거푸집은 콘크리트라는 실체가 부어지기 전까지만 틀을 유지해 주고, 형태가 잡히면 미련 없이 뜯겨 나가 버려진다. 도준(김영민)과 윤희의 사랑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아니라, 박동훈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대항하기 위해 잠시 조립된 가설 구조물이다. 그들은 동훈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소외감을 이겨내기 위해 서로를 틀로 삼았다. 하지만 시멘트가 굳어지듯 자신들의 저열한 실체가 드러나자, 거푸집(관계)은 비틀리고 혐오의 대상이 되어 해체된다.
결핍된 것은 지안처럼 더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어쩌면 변호사 시험에 통과하기 전의 윤희를 동훈은 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윤희의 결핍이 사라지고 완벽한 변호사의 모습으로 들어간 순간, 동훈은 윤희에 대한 사랑보다 후계의 결핍된 식구들에게 더욱 마음을 쏟았다.
도준은 애초에 사랑이란 것을 모르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윤희에게 접근한 것 또한 동훈에 대한 열등감과 미움에 대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결핍되었지만 결핍된 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도준에 대한 동훈의 거부감은 그 지점에서 생긴다. 도준이 자신을 향해 밝게 인사하며 친한 척하는 순간, ‘저 놈 나한테 뭔가 큰 실수 했다’는 강력한 확신을 갖을 정도로.
도준과 윤희는 그 결핍을 숨기고 채우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용했을 뿐, 그곳은 결코 ‘집’이 될 수 없는 구조물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공중전화와 2G 폰은 이 사랑이 가진 불통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오브제다. 공중전화는 내가 걸 수는 있지만 상대가 나를 찾을 수는 없는 수신불가한 장치다. 이는 윤희가 동훈의 세계(후계동)에서 느끼던 소외감을 도준을 통해 보상받으려 했으나, 결국 도준 또한 그녀를 자신의 삶으로 수신(수용)할 마음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2G 폰의 조악한 주파수 또한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얇고 부서지기 쉬운 설계였는지를 증명한다. 그들은 소통하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독을 배설하기 위해 만난 일시적인 수신처였을 뿐이다.
윤희에게 후계동은 박동훈의 성역이자, 자신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드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윤희는 동훈의 주변인(어머니, 형제들, 정희)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동훈의 시선은 늘 자신이 아닌 ‘그들’을 향해 있었다. 옹벽인 동훈이 후계동을 지키느라 아내를 방치했을 때, 윤희는 그 벽을 허물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방법(외도)을 택한다. 도준 역시 동훈의 도덕적 우월함에 질식할 것 같은 열등감을 느낀다. 결핍을 증오하는 도준과 결핍을 견디지 못한 윤희는 동훈이라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어두운 그늘(불륜) 속에 숨어들었으나, 그곳은 서로를 갉아먹는 혐오의 공간이 되었다.
인생 왜 이렇게 치사할까?
사랑하지 않으니까 치사한 거지.
치사한 새끼들 천지야.
나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난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시체처럼 자겠습니다.
한 시간 반이면 오는 데를
이십 년 가까이 왜 못 왔나.
마음이 걸리는 게 있어서 못 왔던 것 같아.
이제 걸리는 게 없니?
나 네 마음에 걸려라.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괴롭게 살아왔는데
나 이제 무슨 짓을 해도 네 마음에 안 걸리는 거니?
그럼 나 이제 무슨 낙으로 사니?
행복하게
편하게
고인돌, 죽은 사랑의 영구보존
상원(박해준)과 정희(오나라)의 사랑은 고인돌이다. 그것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지만 남아있는 사랑이다. 고인돌은 거대하고 무거운 돌덩이일 뿐이지만, 그 아래에는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서사가 잠들어 있다. 누가 와서 옮길 수도 없고, 다시 세울 수도 없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변의 풍경(후계동)을 정의해 버린다.
고인돌은 집이 아니다. 그것은 무덤이다. 상원과 정희의 사랑은 20년 전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고, 그 후로 단 한 치도 자라지 않은 채 거대한 바위처럼 그들 인생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상원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떠났지만, 정작 ‘정희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거대한 바위는 버리지 못했다. 그에게 수행이란 그 바위의 무게를 견디는 내력(耐力)을 기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희는 20년 동안 그 고인돌 옆에 술집을 차리고, 매일 밤 정화수를 떠놓듯 술을 마시며 살아왔다. 그녀에게 속세는 곧 상원이 남기고 간 부재(不在)의 시간이었다.
조애련(정영주)의 등장신은 많지 않지만, 그녀는 단 한 방의 말로 모두의 금기어(윤상원)를 깨버린다. 애련은 동훈의 동창이며 후계동의 순혈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큼 후계동을 싫어한다. ‘징글징글한 삼 형제’라며 형제들을 몰아붙이고 상훈에게 이혼하자고 떼를 쓴다. 그녀는 후계동 안에 있으면서 철저하게 외부자의 시선으로 후계동을 심판한다. 그 싫어함은 윤희와 비슷하지만, 그 싦음은 애증의 싦음이다. 윤희가 외부자라면 애련은 지친 거주자다. 그녀는 정희가 만들어 놓은 윤상원이라는 금기어를 추억이라는 망치 하나로 단박에 깨버린다. 왜냐하면 그녀야말로 극 중, 현실과 포기하는 마음에 대해서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이 구호는 고인돌이 비로소 무덤이라는 상징성을 넘어 두 사람의 사랑이 후계라는 행성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거창한 전설이 아니라 후계동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증표가 된다. 다 버린 상원과 하나도 버리지 못한 정희는, 결국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하나만을 남긴 채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함(至安)에 도달한다. 고인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금기하지 않는다.
나 원래대로 펼쳐 놔요.
감독님이 구겨놨으니까.
다시 깨끗하게 펼쳐 놔요.
활짝 펴놔요. 원래대로.
좀 전의 그거요.
내일 잘해라
저 1cm는 펴진 것 같아요.
유라는 기훈의 망함을 사랑스러워한다. 자신의 망함이 누군가의 성공으로 치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의 망함을 자신의 망함으로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망함은 망함이 아니라 마음이다. 유라는 기훈에게 망가진 자신을 다시 복원시켜 달라고 말하고 유라는 그 말대로 펼쳐지지만, 기훈이 여전히 구겨져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유라에게 기훈의 망함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자신을 파괴했던 천재성이라는 폭력이 해체됨을 의미한다. 유라는 기훈에 의해 구겨진 존재였다. 감독 기훈이 쏟아낸 독설과 압박은 유라라는 부드러운 종이를 사정없이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과 같았다. 유라가 기훈의 망함을 사랑한 이유는 명확하다. 나를 구겼던 그 거대한 ‘외력(감독의 권위)’이 사라졌을 때, 유라는 비로소 숨을 쉰다. 그의 망함은 유라에게 성공한 자들의 오만이 없는 비무장 지대다.
“다시 깨끗하게 펼쳐 놔요”라는 유라의 요구는, 자신을 망가뜨린 설계자가 다시 손을 대어 구김을 펴달라는 정서적 복원 공사의 청탁이다. 기훈이 “내일 잘해라”라는 툭 던진 한마디는 유라의 구겨진 영혼을 1cm 펴내는 가장 강력한 인장력이 되었다.
유라는 기훈을 통해 서서히 원래의 평면을 회복해 간다. 그녀는 다시 빛나는 배우로, 다시 웃는 인간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비극적인 구조적 불균형이 발생한다. 유라가 펼쳐질수록, 그녀를 펴주던 기훈은 여전히 청소 도구를 든 구겨진 조립식 건물로 남아 있다. 유라는 이제 기훈 없이도 바로 설 수 있는 탄성을 회복했지만, 기훈은 유라의 회복을 보며 자신의 구겨진 자존심(천재성에 대한 미련)을 더욱 뼈아프게 직시한다. 결국, 이 비대칭이 두 후계인을 갈라놓게 된다.
기훈이 마지막에 쓰기 시작한 ‘그랜드 캐년이 돌아왔다’라는 대본은 유라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가 자신을 구기고 있던 천재라는 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구기고 괴롭혀봤자, 거대한 자연의 균열(그랜드캐년) 앞에서는 그 슬픔조차 별것 아닌 감정에 불과하다. 기훈은 유라를 보내주고 나서야, 자신을 구기고 있던 스스로의 손을 놓는다. 그가 쓰는 대본은 단순한 재기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펼쳐내는 삶의 설계도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확 죽여버릴까.
그냥 내가 죽어버릴까.
건축 구조적 관점에서 천막은 지반을 파지 않는다. 기둥도, 보도 없이 오직 팽팽하게 당겨진 장력(증오)만으로 버티는 임시 구조물이다. 박동훈이 옹벽이고 이지안이 가건물이라면, 이광일(장기용)은 언제든 걷어치워질 수 있는, 혹은 찢어질 듯 펄럭이는 천막이다.
후계동 사람들에게는 '정희네'나 '형제들'이라는 기반이 있지만, 광일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와 폭력이라는 척박한 땅뿐이었다. 그는 집을 지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지안을 괴롭히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임시 막사를 쳤다.
천막은 줄을 세게 당길수록 팽팽해지지만, 그 줄이 끊어지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광일에게 그 줄은 지안에 대한 악의 섞인 애착이었다. 지안을 때리고 괴롭히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고, 그 장력이 사라지는 순간 광일이라는 천막은 힘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는 광일의 마음은 지안을 원망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의 공존이었을 것이다. 그 둘은 가장 닮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던 관계다. 그는 선의를 통해 지안에게 다가갔지만 악의만 남았고, 악의를 가지고 지안을 대하다가 뒤늦게 선의를 택한다. 그러나 그에게 남는 것은 없다. 그는 후계의 존재도 모르고, 그가 최후에 이르러 평안에 도달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어쩌면 그 둘이 서로의 불쌍함을 일찍 공유했다면 서로를 사랑했을까. 광일은 아버지를 죽인 지안을 용서할 수 없었고, 지안은 광일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동훈이 지안에게 '가보지 못한 어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광일은 지안이 '발 딛고 있는 지옥의 바닥' 그 자체였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너무 잘 알기에, 그 상처를 건드리는 것 외에는 대화법을 배우지 못했다. 광일이 지안을 죽여버릴까 아니면 내가 죽을까 고민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이분법적 자각 때문이었다.
그는 지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존 수단(채권자의 권리)을 투척하며,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증오의 줄을 끊어버린다. 그는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답을 스스로 내었다. 천막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순간, 그 밑에 가려져 있던 음지(상처)는 비로소 햇빛을 마주하게 된다. 광일은 자신이 사라짐으로써 지안이 '평안(至安)'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지안志安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이 드라마의 핵심 문법은 버티는 것이다. 모든 인물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삶의 무게(외력)를 각자의 방식으로 감당한다. 또한 그 감당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후계동이 있고, 그 수많은 후계동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아는 체해주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굳이 행복하게 해주지 않아도 된다.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지나가며 모른 척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그런 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에게 내어줄 수 있는 최대한의 관심이 아닐까.
당신의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은 하루라면 좋겠다.
파이팅!
故이선균 배우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 또한 편안함에 이르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