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뒤단당신

뒷면의 궤도

by 슴도치

나는 집에서 당신의 뒤통수만 보았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당신은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심지어 세수도 했을 테지만 나는 신기하게 당신의 뒤통수만 보았다. 달이 지구의 앞면만 보여주는 것을 조석 고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게 뒤통수로만 고정되어있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당신이 내게 현관문 앞에 배달된 우유를 가져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당신의 얼굴을 보겠노라 했지만 신문을 가지러 간 사이 식탁 위에 놓인 우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저번에는 꽃구경을 가자고 했지만 당신 걸음이 빨라서 한참 뒤처진 나는 꽃도, 꽃처럼 이뻤을 당신 얼굴도 보지 못했다.


어느 주말 오후. 너무 답답하고 심심해진 나는 당신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하면 할수록 그것은 어쩐지 막막하고 서글픈 일이 되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당신의 구두 벗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얼른 일어나 마중하러 나갔지만, 외투를 벗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 그 빌어먹을 뒷모습에 격분한 나는 당신의 어깨를 잡고 뒤로 돌렸지만, 아니, 거기에도 세차게 흐르는 뒤통수뿐이 없었다. 그날, 당신의 머리카락처럼 비가 오던 그날. 그래, 그날부터. 당신의 뒤통수와 나는 자꾸 같은 속도로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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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 뒤통수를 보지 못한다. 누군가 나의 뒤통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고 있는 걸 듣고 있는다면 나는 어쩐지 감격스러워진다. 뒤통수를 기억한다는 건 내가 떠나거나 내가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것은 일방형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더 깊고 아련하다. 사랑은 무형이지만,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라는 것의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얼굴보다는 뒤통수로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끝내 닿지 못하는 사랑의 궤도
그리고 그 궤도를 자신도 모르게 빙글빙글 돌고 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 있다. 달이 지구를 향해 항상 같은 면만 보여주는 '조석고정' 현상처럼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끝없이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면만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겁이 많고, 생각보다 상대를 더 많이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좋은 면, 이쁜 면, 다치지 않을 면만 보여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삶도 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당신의 뒤통수만 보고, 뒤통수에 울고, 뒤통수에 떠들고, 뒤통수에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당신을 지켜보지만 당신은 어디를 보는지 모르겠다. 분명 옆에 있고, 온기도 느껴지고, 대답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더 외롭고 어렵다.



감정의 불균형, 감정의 일방성, 감정 접근의 불허. “표지판을 못 보셨나요?” 그런 것은 꼭 잘 보이지 않을 곳에 설치해 놓는다. 하지만 그 표지판을 미리 보았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고민은 했겠지만 아마 나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결말이 예정된 관계도 존재한다. 하지만 아픔이라는 게 꼭 나쁜 걸까? 어느 지점에 가서는 그런 섬뜩한 질문도 해보는 것이다.



관계의 한쪽 면만 바라보게 되는 사람의 슬픔


당신을 돌려세워봐도 똑같은 뒤통수라는 설정은 막막하다. 달의 뒷면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폐쇄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면만 바라보고 있어야 된다는, 생을 다해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역시 아득하다. 당신을 깨부수고 싶다. 부딪히고 울리고 싶다. 엉망으로 만들고 쓰러뜨리고 싶다. 그리고 당신의 악다구니를 듣고 싶다. 욕설을 하고 나를 떠밀고 화를 내었으면 한다. 나는 가끔 당신의 밑바닥도 보고 싶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추한 표정도 보고 싶다. 당신의 내밀하고 뒤틀린 감정도 느끼고 싶다. 왜냐하면 그건 당신과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니까. 우리의 비밀을 공유하고 싶다. 당신의 고운 면과 미운 면을 고루 알고 싶다. 그렇게 내가 천천히 한 발자국씩 당신께 다가가고, 당신이 미세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것은 달의 뒷면에 착륙하는 것만큼 대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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