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되는 미완의 완성
아흐렛날이 지났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숨어 움직이지 않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 것들로 움직이지 않았다. 장마는 9월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불어난 강, 둑 너머 도로께에 물고기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파닥거리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벌어진 아가미 사이로도 물이 나왔다. 그것을 주워 먹으려고 새도 오지 않았다. 깃털이 젖은 새는 날지 못했다. 움직이는 거라곤 오로지 비와 물줄기뿐이었다. 우리는 9층에서 구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고 갑자기 뚝- 끊기기도 했다.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홍수처럼 있었다.
한참 조용히 있던 네가 귓속말로
1 2 3 4 5 6 7 8…
숫자를 거꾸로 세면 괜히 초조해졌고 바로 세는 숫자는 기다려졌다. 그러나 예고하고 벌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 숫자 셈은 내가 내게 알려주는 소리 같았다. 구름이 허기처럼 낮게 날았다. 거기에서 내려올 물도 한 세상만큼 있을 거였다. 한 번은 사람들이 모여 거리를 행진한 적도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치고 웃고 울었다. 하지만 몇백 미터도 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도 숫자를 다 세어버린 걸까? 비도 울음도 그치지 않았다. 높은 곳으로 올라간 그들도 때가 되면 마땅히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마 더 배고픈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9까지 숫자를 센 네가 창문을 열고 난간에 올라섰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 … 그리고
이 세상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인류와 문명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 마지막 순간은 어떤 풍경과 소리와 냄새일까.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세상의 비는 소모적이다. 그것은 사막의 모래바람과 다를 게 없다.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해 보라면 나는 늘 사막의 황량함보다는 비로 흥건한 세상이 떠오른다. 움직이는 거라곤 크고 작은 물줄기. 들리는 거라곤 빗소리. 물 비린내, 녹이 슬고 천천히 끝장나는 무너진 세상.
인류의 시작이 짠- 하고 나타난 게 아닌 것처럼, 인류의 마지막도 천천히 진행될 것이다. 시작한 줄도 모르게. 어느새 눈치채고 보면 아, 이게 끝이구나. 겨우 깨달을 만큼 은밀히.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축축해지는 것처럼. 인류는 언젠가 멸종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태어나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 그럼에도 그 끝이 궁금해지는 건 나 또한 인류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마지막은 처형당하듯이 끝나는 게 아니라 천천히 병들 듯이 침대 위에서 맞이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오랜 시간이 지난 미래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진행되고 인류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싶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무관심한 것에 대하여. 처절하게 싸울 때는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 진짜 마지막은 아무런 느낌도 없을 때다. 타인의 죽음에, 아니 자신의 죽음마저도 아무 할 말이 없을 때. 종말은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고성과 주먹다짐이 아닌 침묵으로.
그렇다. 침묵이다. 침묵은 곧 종말이다. 우리가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해 침묵할 때. 우리는 끝장나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의 침묵이 슬프다. 차라리 욕을 하고 난도질을 하는 게 낫다. 침묵은 슬픈 거다. 죽은 물고기의 눈과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인간이 다른 인간과 대화하고 타협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타인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찾아야 한다. 물은 차오르고 숨은 모자란데, 하지만 거기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다면 그게 바로 종말이지 뭐.
9 다음의 세상은 천천히 세고 싶다
누구나 마지막은 미루고 싶은 거다. 그래서 나는 집 밖으로 나가기 전, 배낭에 생존 물품을 챙기듯,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마음속에 채워둔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생존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다. 그것 또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저절로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다. 숨을 쉴 정도의 노력은 늘 필요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볕에 말리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나에 대한 관심이다. 어제까지 비가 오더니 오늘은 맑게 개었다. 내 마음도 당신에게 화창했다면 좋겠다. 보송보송했다면 좋겠다.
그렇게 최대한 천천히 끝장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