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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집 Mar 06. 2023

그날의 나는......


2016년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엄마는 내내 간병을 했다. 월화수목금 오후까지 엄마가 아버지를 돌보고, 내가 금요일 퇴근 이후부터 토일 오후까지 아버지를 돌봤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중간중간 아이들의 점심 저녁을 챙겼다. 왔다 갔다 움직이는 사이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19년 9월 다른 기관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시험을 봤고, 합격을 했다. 예쁘게 그만두려고 수요일이 퇴직일이었지만, 금요일까지 근무를 했다.


그 금요일 간병을 하던 엄마가 허리병이 다시 도진 바람에 갑자기 쓰러졌다. 급하게 서귀포로 달려간 병원에선 아빠와 엄마가 각자 다른 병실 3층과 4층에 누워계셨다. 내가 병원에 가자 곁에서 도와주던 삼촌과 고모는 내게 당연한 듯 엄마와 아빠를 맡기고 다들 떠났다. 검사 동안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다들 저녁을 먹여 보낸 참이었다.     


보호자는 나 하나, 같은 병실에 모셨으면 좋겠다는 말에 병원 측에서는 남녀가 같은 병실에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저녁 아홉 시, 나는 그 병원에서 난리를 쳤다. 내가 유일한 보호자이고, 부부인데 왜 남녀를 따지냐고, 나 혼자 3층과 4층을 어떻게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떻게 케어를 하냐고, 당장 2인실에 같이 넣어달라고 말이다.     

엄마 아빠의 침대를 양옆에 두고, 가운데 간이침대에서 간병을 했다. 한쪽엔 옴짝달싹 못 하는 엄마, 한쪽엔 요구사항이 많은 아빠. 밤이 깊어가도록 나는 잠을 잘 수도, 쉴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동안에도 아이들의 밥을 뭘로 줘야 하냐며 집에서는 연락이 왔다. 내가 밥을 먹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월요일부터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할 나는 일요일 밤에 간병인에게 엄마 아빠를 맡기고, 12시가 다 되어서야 제주시로 돌아와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을 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나는 프린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동네 행사들, 축제 축사들, 체육대회 축사들 비슷비슷한 행사들과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보태 글을 작성해야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늘 내 앞에 있었기 때문.  


아빠의 임종 당시 동생들은 서울에 있었다. 엄마는 어떤 결정을 하기엔 감정적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내게 서류를 받고자 이것저것을 물었다. 연명치료를 하겠느냐, 그렇게 되면 이러저러한 과정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이 사실 환자에게는 의미가 없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감정을 꾹꾹 눌러 참으며, 행정적 처리에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그 자리에 있는 내게 최선이었기에.


나의 결정이라기보다 그들이 원하는 과정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많은 생채기가 났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혹은 아직도 서 있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순간순간 울컥한다.



어떻게 견뎠니, 누구의 응원도 받지 않고, 그렇게 매일의 시간을 꾸역꾸역 어떻게 버텼니.

그러면서 너를 증명하려고, 그렇게 매일매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어떻게 버텼니.

당장의 어려움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매일 겨우 참아내던 시간.    

 

그 시간을 지나고 나니 겨우 내가 보인다.

빛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별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그렇게 걸어갔다는 것.

그 누구에게도 나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는 자랑스러움.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엄마는 지난해 항암을 하고 올해부터는 지켜보자는 진단을 받았다.

곳곳에서 아프다는 이들의 전언이 들려오고, 나는 조용히 조용히 그 소식을 듣는다.

앞으로도 들어야 할 슬픈 소식이 많겠지만, 그래도 잘 견뎌낼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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