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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김혜순, [피어라 돼지] , 문학과지성사, 2016

by 겨울집


< 춤이란 춤 >


당신의 인생을 5분 안에 몸으로 표현해보세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춤이란 그런 것

내 인생의 테이프를 전속력으로 돌리자

정신박약아의 파안 미소와 눈물 어린 정적이 남았습니다


눈 깜빡하는 순간에 나를 깜빡 잊어버리고

눈 깜빡하는 순간에 당신을 깜빡 잊어버리고


얼음거실이 천천히 녹고 있어요

다 녹기 전에 당신의 인생을

5분으로 줄여보세요

그 춤을 다 추면 집은 녹고요

그리고 당신은 죽어요


문은 열려 있는데 밖은 환한데

바람 가고 가을 가고 눈보라!

나무들이 머리에 인 보따리 떨구고 이사를 가는데


이 세상에 '잊었다'는 말이 있다는 걸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잊고 나서 어떻게 잊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내가 이 세상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가는 춤을 추는 중이에요


당신의 인생을 비커에 넣고 흔들어보세요

숟가락을 삼켰다 뱉었다

배를 항구에 붙였다 뗐다

손가락을 얽었다 풀었다

이건 스토리가 아니에요

이건 마비예요

이건 응결 중인 꿈이에요

비커엔 빨간 물이 찰랑거리네요

흘러내리는 화산도 솟아오르는 피도 붉은색

살아 있다면 저런 색이죠


빨강을 처음 본 사람의 표정을 지어보세요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찾아 헤매는 여자에게

눕자고 눕자고 눕자고

달라고 달라고 달라고

무엇이 갖고 싶은 줄도 모르면서

있잖아요! 있잖아요! 있잖아요!


손을 힘껏 뻗치는 여자에게


핵발전소 터지고 30년 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수용소에 온 것 같아요

눈뜨고는 못 볼 자위에 빠진 헛손짓 헛발짓의 무대

혀가 껌처럼 이빨에 눌어붙은 것처럼

땅에 찰싹 눌어붙어서는


당신의 인생을 몇 개의 동작으로 분류해보세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허공을 움켜쥐고 매달려 있는 박쥐처럼

명령을 내리시는 선생님


턱이 가슴에 붙들린 사람처럼

박쥐의 작은 몸에 들어간 그녀가

갈 곳 잃은 마지막 눈빛으로 그녀가

개처럼 묶여서 대문처럼 삐걱거리는 그녀가


싱싱한 장미가 주먹 속에서 숨을 거두는 것처럼

태양이 그만 놓아버린 행성의 꼬리처럼


춤!


몸에 들어 있는 새를 꺼내보세요

새에게 원금을 갚으세요 자꾸 갚으세요

몸속의 물고기를 꺼내보세요

물고기에게 원금을 갚으세요 자꾸 갚으세요

우리의 멀고 먼 조상들께 빚을 갚아보세요 자꾸 갚아보세요


땅에 떨어진 새처럼

결국 땅속에 묻히는 새처럼

그 발걸음으로 쏟아지는 눈발들의 레이스를 짜보세요

두 팔로 공중에 흰 박쥐의 집을 지어보세요

저런 저런 당신의 지붕이 쏟아지네요


인생을 5분 안에 몸으로 표현해보세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바다를 끄는 초승달처럼

당신의 심장이 끌어당기는 해변처럼

네 개의 달이 내 팔다리를 끌어가는데

정신병자들이 헤매는 정신의 그곳을 뒤쫒아 들어 가는 것처럼

일어났다 누웠다 일어났다 누웠다

딱딱한 꿈들이 끄는 인력에 버둥거리면서


이 춤을 다 추면 얼음이 녹고요 그리고 당신은 죽어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이 춤을 다 추면 얼음이 녹고요 그리고 당신은 죽어요”


녹고요와 그리고 사이에 마침표가 없다.

그러므로 얼음이 녹는 순간이 진행되는 동시에 당신의 죽음도 함께 진행된다.

녹고요 라는 말 안에 죽음을 향한 깊은 고요의 시간이 감겨 휘돌아나가는 기분이다.


얼음이 녹아내리는 고요한 시간

당신이 저 멀리 떠나는 그 시간

죽음이 과연 나쁜가.

춤과 함께 이 세계 밖으로 떠나가는 것.


어쩌면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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