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3일 세화리 마을 습격
※ 『제주 4・3 유적 Ⅰ』 세화리, 643-644쪽
1948년 12월 3일 무장대는 세화리를 습격하며 세화 주민들의 피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날 밤 무장대는 밤 9시께 마을을 습격했으나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는 세화지서가 아니라 민가에 무차별적으로 불을 지르고 주민 살해를 자행했다.
당시 민보단에 편입돼 보초 서던 사람은 물론이고 열 살 미만의 어린이에서부터 70세 노파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한 40여 명의 주민이 무장대에 살해되고, 주택 50여 채가 전소됐다.
이날 습격은 지서가 있던 세화리를 주 대상으로 삼았지만, 다음날인 12월 4일 새벽까지 지속되며 이웃 평대나 하도, 상도, 종달을 덩달아 기습당했고, 세화국민학교와 하도국민학교도 전소됐다. 이날 무장대 기습의 여파는 엄청났다. 토벌대는 곧 보복에 들어가 지서 수감자나 도피자 가족, 입산자 가족은 물론 많은 지역주민들을 이유 없이 죽음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다.
세화리 주민 이00은 1948년 12월 3일(음력 11월 3일), 무장대의 세화리 마을 습격 당시 자택에서 무장대에 발각되어 죽창살해 당한 후 가옥과 함께 방화되었다. 이00는 세화리에 있던 집 근처에 일을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위에서 죽창을 들고 따라오는 사람들에 쫓겨 집으로 들어왔으며, 아들인 김xx을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왔는데 무장대가 부엌까지 따라들어와 죽창살해했다. 이때 아들 김xx을 껴안은 상태였는데, 이때 김xx도 죽창에 찔려 왼쪽 팔뚝에 흉터가 있다. 아들 김xx은 피를 흘리며 마당으로 나와 화장실에 숨었다가 기절하였는데 숙부가 발견하여 숙부집에서 혼수상태로 있다가 1주일 후 깨어난 후, 부산에 있는 친척집에서 살다가 고아원으로 가게 되었다.
1948년 12월 3일 세화리는 마을 전체가 습격을 당했다.
세화지서에 경찰들이 있었음에도 무장대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살인을 자행하고 불을 질렀고, 세화리 습격 이후에 이웃 마을도 습격하면서 이날의 희생자는 엄청나게 발생했다.
무장대에게 희생당한 주민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중 무장대와 연관자들은 보복 살해 당했다.
세화리 주민 이00은 죽는 순간까지 아이를 지키려 노력했다.
아이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길 바랬기에 집 밖에서 몸을 피신할 수 있었음에도,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찾았을 것이다.
허나 엄마는 아이와 끝까지 함께할 수 없었다.
쫓아오는 사람들을 막고 싶었겠지만, 연약한 몸으로 맞서 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몸으로 아이를 감싸 죽는 순간까지 보호하는 것.
아이는 다행히 엄마의 바람대로 목숨을 부지했다.
죽창에 찔려 흉터가 남았을지언정 이 세상의 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숙부가 발견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고아원으로 가게 된 아이는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부모 없이, 돌봐주는 이 없이, 연고 없는 사람들 틈에 묻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하고 지금까지 삶을 붙들고 있는걸까.
아님 막막한 외로움과 불안으로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