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뱃속의 아이는
1948년 10월 30일 후유장애
고성리 주민 이00( 여, 20)는 1948년 10월 30일 아침 집 주위에서 총소리가 나자 무서운 마음에 정신없이 집을 나와 숨을 곳을 찾아 뛰어가다 아침 9시경 감낭굴 부근에서 군인의 총에 가슴 아래 관통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현재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
※ 제주MBC, 「4·3증언 나는 말한다」, 26회(1999.12.10.)
“살길이 없을거다고 해서 살다살다 보니 시아버님네가 아기도 가진 줄 몰랐어. 친정에 있다가 시댁에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사람들을 잡아가니까 너도 나랑 같이 뛰라고 해서 시어머니랑 같이 뛰다가 총에 맞았어. 총을 맞은 다음에야 아기를 가진 줄 알았지. 총에 맞았는데 군인들이 집 근처에 데려다줬고 시어머니네가 데려가서 살다보니까 얘기가 있어서 그 아기가 낳습니다. 아무래도 살젠 하니까 눈도 어둡고 기가 막혀져.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아기를 생각해서 살아달라고 수백 번을 빌어마시. 꽃같은 청춘을 나같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다보니까 시어머니는 먼저 돌아가불고 시아버님은 18년을 모시고 살아도 16년을 오줌걸레, 똥 걸레 빨다 보니까 86세에 돌아갔습니다. 4·3생각을 하면 지긋지긋합니다. 그 당시 남편이 죽었는데 군인을 가라고 하니까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어. 우리 시아버지는 무식해서 해 볼 능력이 없어. 혼인신고도 안했는데 그냥 사망신고를 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없는 아들을 만들어 혼인신고를 하고 아기를 입적시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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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새파란 청춘이었다.
아이를 가진 줄도 모를만큼 짧은 시간을 남편과 보냈다.
사실 남편과 정이 쌓이기도 전 남편을 잃었다.
개가를 할 수도 있었다.
허나 총을 맞기 전까지 몰랐던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제발 아이를 위해, 자신들의 흔적을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는 순간.
나라면 어땠을까. 아득해진다.
아이를 함께 키워줄 거라고 믿었던 시어머니도 먼저 돌아가시고,
시아버지의 간병을 16년 동안 했다는 희생자의 사연을 보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가 사무실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니,
바로 어제 용꽈배기를 사무실에 전해주고 가신 분이
뱃속에 있었던 그 아기라고 한다.
아이의 입적을 위해 없는 아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연의 그 아이.
내가 오늘 만난 희생자들이
오늘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가족이구나 생각하면
함부로 허투루 사연을 흘려보낼 수가 없다.
그러니 침침해지는 눈을 다잡고, 매일 명부를 꼼꼼히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