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디 피콜트, [쌍둥이별], 이레, 2008.
아이가 생기면 삶이 달라진다고들 흔히 말한다. 나 또한 그랬다. 아이가 생기면서 내 삶은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행성처럼 변해버렸다. 뱃속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실감할 수 없었던 아이가 매일 웃고, 울고, 옹알이를 하고, 뒤집고, 앉고, 이가 나고 하루하루 새로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삶은 어땠을까란 생각에 빠진다. 아이가 다 커서 자신의 삶을 준비할 이 시기에도 아직 아찔하다. 모든 부모에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란 말이 때때로 실감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맞춤아기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언니 케이트의 삶 혹은 죽음을 공유해야만 하는 아이인 안나는 백혈병에 걸린 언니 케이트를 위해서 유전자를 수정하여 동종기증자, 형제간 완전일치자로 태어난 아이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부모를 고소해야만 했던 아이 안나. 겨우 열세 살의 아이가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이란 어느 만큼일까.
조디 린 피콜트의 소설 쌍둥이별은 발간 전부터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주제로 굉장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까지도 개봉했으니 그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쌍둥이별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생명권과 장기기증, 맞춤아기, 자녀에 대한 부모의 통제권 등을 논한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읽을 수는 없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던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는 낙태 논란이 한참이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사이에 두고 텔레비전 토론회에서는 양쪽의 의견이 팽팽했다. 물론 낙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사회적인 합의는 분명히 필요하다. 낙태 문제의 공론화를 통해 국민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관이 견고하게 만들어진다면 그동안 음지에서 이루어지던 낙태에 대한 기준과 생명권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관이 제대로 설 수 있는 기회였다. 어느 쪽으로도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어려운 화두였다. 나 또한 아이를 갖기 전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시기성과 아이를 가짐으로써 영향을 받게 될 생활의 자유를 심각하게 고민해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텔레비전의 토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소모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난 이 책에 빠져들었다. 우리 삶의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가 과연 누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 가족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인연들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여러 가지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고치의 행복을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꿈을 꾸게 되는 것 아닐까.
안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언니에게 필요한 제대혈, 백혈구, 줄기세포, 골수 등을 제공해왔고, 안나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가족들의 시선과 자신의 역할 안에서 순응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열세 살이 되던 해 안나는 자신의 신장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대항해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밖으로 드러낸다. 일반적인 사춘기 소녀들도 십대 초반이면 나는 누구인가라며 자신에 대해 묻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안나에게는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고민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아픈 것이었을까.
아마 수많은 질문을 자신에게 쏟아냈을 것이다.
부모의 결정 아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안나가 수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안나 안에서 자라난 자존감이 이 아이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드러내고 빛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3살짜리 아이들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싫은 것을 명확하게 주장하는데, 부모의 통제 아래서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보여지는 아이가 제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 변호사를 구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기까지의 과정은 엄마인 사라의 입장에서 볼 때 섭섭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라의 시점으로 케이트가 백혈병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해나가는 과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울컥거린다. 이미 나는 케이트를 내 아이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의 입장에서 내 아이가 아프다면 나 또한 같은 선택을 했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부모에게 어느 자식인들 소중하지 않을까. 자신의 모든 아이들이 각자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어렵고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이들 가족의 상황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객관적으로는 장기매매나 유전자 조작과 같은 의료행위는 분명 불법이고,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다. 허나 당신의 아이가 아프다면, 당신의 부모가 아프다면, 당신의 남편이 아프다면, 더 나아가 당신 자신이 아프다면 우리는 어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책은 안나와 오빠인 제시, 아빠인 브라이언, 엄마 사라, 변호사인 캠벨, 소송후견인인 줄리아의 입장을 돌아가면서 서술한다.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각 가족이 케이트를 중심으로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안나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소송을 했다고 보여졌던 사건은 재판에서 안나가 증언을 하면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케이트는 살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안나를 계속 희생시키면서 삶을 지속해 나가기는 싫다고, 스스로 존엄한 ‘인간’으로써 살고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니의 제대로 된 삶을 지켜주기 위해 안나도 선택을 한 것이다.
재판은 결국 안나의 손을 들어주지만, 그것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판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들 가족의 문제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기서 안나의 죽음을 통해 케이트에게 신장이 이식되는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독자들에게 판단을 양보한다.
우리에게 케이트와 안나의 경우가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런 일이 닥쳤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성적인 판단과 결정만으로 그 상황들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고 자기 가치를 소중히 할 줄 알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이 부모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욕심이자,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