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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숨 Dec 25. 2021

<접속>, 엑스트라들의 번외 로맨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2021년이 되어서야 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옛 것에서 낭만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딘가 과하게 아름답고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삐삐를 사용하고 PC통신을 사용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일 것이 분명한데도 삐삐와 PC통신을 그리워해서 만든 영화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또한 2021년이 되어서야 이 영화를 보는 젊은이인 나의 얘기일 뿐이겠지만...그렇다. 이 영화의 포스터 중앙 상단에는 'A New Age Love Story'라고 적혀 있다. 이 영화도 그 당시에는 신세대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취향 중에서 가장 은밀한 것이 음악 취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는 서로의 mp3에 있는 음악을 함께 들으며 깔깔 웃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이런 걸 듣냐고 타박을 하기도 한다. 그 장면 이후 두 주인공은 누구보다도 깊은 유대감을 가지게 되는데, 가장 안쪽의 음악을 꺼내들었을 때 그것을 알고 반가워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였어도 한 마디 대화 없이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물며 해묵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는 남자에게 옛 애인이 보내온 낡은 LP판 속의 음악이, 그 날의 신청곡으로 들어왔을 때의 마음이야, 어쩌면 이게 '운명'인가 싶지 않았겠는가.


여인2 라는 이름으로 채팅방에 등장한 수현은 본인의 아이디에 얽힌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연극을 할 당시에 처음으로 맡은 배역이 바로 여인2 였던 것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채팅방 아이디로까지 쓰고 있다는 것인데,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동현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인2에 지나지 않았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같은 가사가 어울리는 그녀의 사랑은 체념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이미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기철과 은희 사이에서 마음을 숨기고 있는 수현은 본인의 집 안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갈 곳을 모르고 헤매다가 자리를 피해주기까지 한다. 수현은 이미 본인이 그들의 사랑에 끼어든 엑스트라라고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동현의 사랑도 수현의 사랑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동현 또한 선배의 애인을 사랑했고 선배가 군대를 간 사이에 그 애인과 관계를 이루어낸 사람이었다. 애초부터 둘 마음엔 발이 걸릴 수밖에 없는 장애물이 존재했고, 동현은 그것을 알고서도 감내하겠다 마음먹었지만 영혜는 그러지 못했다. 끝끝내 동현을 사랑하는 데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옛 애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영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동현은 남자2가 되어 선배와 영혜의 이야기에 영원히 간섭할 수 없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고독한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엑스트라와 엑스트라의 사랑 이야기다. 서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이끼리 만나 마침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다. 네가 미련하네 니가 겁쟁이네 하면서 서로의 짝사랑에 대해 험담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결국 본인에게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서로의 조언에 따라 수현은 기철을 찾아가 마음을 은근하게 표현하고 키스까지 하지만, 이내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택시를 타고 포항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택시비가)어마어마한 일을 벌인다. 용기를 내 본 수현은 이제 엑스트라가 아니라 훌륭하게 실패한 주인공이 되어 다른 사랑을 찾아볼 용기를 내는데, 그 용기는 동현에게로 향한다.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수현은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서서 동현을 기다리지만, 동현은 그 날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된다. 





수현과 극장에서 만나기로 한 당일, 동현은 영원히 선배와 영혜의 이야기에서 엑스트라가 되고 만다. 영혜가 마침내 선배를 선택했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고 이야기하는 동현의 목소리는 더없이 쓸쓸하지만 비로소 본인의 처지를 인정하고 이해한 듯한 느낌도 동반한다. 결핍을 인정하는 순간 성장한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동현도 아마 그 순간을 겪은 것이리라. 그리고 결핍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주인공이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 


하지만 처지를 인정했다고 해서 바로 태세 변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 애인이 죽었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이루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련은 무거운 것이다. 동현은 오래간 수현의 메시지를 받지 않고, 머나먼 이국 땅으로 이민을 갈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수현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동현에게 메일을 보내고 메시지를 남긴다. 짝사랑하는 친구에게는 한 번 용기내는 것도 두려워했던 그를 생각하면 수현은 이미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들은 왜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들만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순리인가. 하여간에 동현은 죽어라고 수현의 속을 썩이고, 심지어는 수현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자리에 앉아서 그가 언제까지 본인을 기다리나 시험해보기라도 하는 듯이 군다. 그렇게까지 겁먹고 사랑을 시험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동현은 본인의 바로 뒤에서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수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 





둘은 서로의 상처를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죽을 때까지 숨겼을 수도 있는 지난 날의 아픈 사랑 이야기를 그들은 알고 있다. 영영 짝사랑으로 남아버린 본인의 아픈 엑스트라 시절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 이 영화의 끝은 연애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이제 막 얼굴을 본 사이다.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기까지는 동현 때문에라도 오래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수현은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예감을 한껏 머금은 장면을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끝이 난다.


이야기에 비해 접속이라는 제목이 너무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 편으로는 너무 잘 지어진 제목 같기도 하다. 접속이야말로 그들을 이어준 계기이기도 하고, 또 신세대의 사랑 이야기인 만큼 그것을 강조해야 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12월에 보기 아주 좋은, 포근한 영화라는 감상이 남는다. 오랜 고찰을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닌 만큼 크리스마스에 혼자라면 나처럼 즐기기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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