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를 만나다] 숨고가 만난 26번째 사람
바둑 판 위가 아니라 바둑 판 너머 사람을 보려 해요.
바둑판을 중간에 매개로 두고
그 건너편에 있는 사람에 관심을 기울이는 거죠.
숨고가 만난 스물여섯 번째 사람
바둑 세미프로, 이승엽
혹은
숨고 바둑 레슨 고수, 이승엽
여섯 살 때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큰아버지, 고모부, 그리고 저희 아버지까지 집 안 어르신들께서 바둑을 즐겨 두셨어요. 아들인 저에게도 바둑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셔서 바둑 교실에 다니게 되었어요. 제가 장난기가 많았어서 좀 차분해지라고 바둑 교실에 보내셨던 것도 있었고요. 그렇게 어려서 시작한 바둑에 재미를 붙여서 입문~초보 수준의 바둑 교실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프로 기사의 길을 보고 바둑 도장으로 옮겼었어요.
바둑 도장으로 옮긴 뒤에는 매일매일 열심히 바둑을 배웠어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4교시까지만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5~7 교시는 반드시 출석하지 않아도 되는 단축 수업 특혜도 누리며, 오후 내내 바둑에 열중했고요. 또래 친구들이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바둑 실력을 갈고닦으려면 정말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사실 고등학생 때 바둑이 싫어졌었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거의 내내 고시생처럼 바둑만 팠고요. 처음에는 일반 중학교에 갔다가 바둑 연습 시간이 턱 없이 부족해서 바둑특기생이 있는 중학교로 전학 가서, 그 뒤로 최소 수업일수만 채우고 나머지는 다 바둑 공부였죠. 일반적인 학창 시절은 아니었던 셈이에요.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더 들면서 바둑판 위 경쟁에 대한 압박감이 점점 더 커졌어요. 그 부담 때문에 고1 때 바둑을 그만뒀었죠.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우직하게 걸어가던 프로 기사의 길을 포기하고 나니, 다시 학업으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이 쉽지는 않았어요. 외국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고 싶어 부모님을 설득해 필리핀으로 1년 정도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그 뒤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고, 졸업 후 미국 전문대 커뮤니케이션 학과에 진학했어요. 지금은 어찌어찌하다 보니 제대 후 한국에서 바둑을 가르치고 있고요.
훌쩍 떠났던 필리핀 어학연수 시설에서 바둑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를 만났었어요. 당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었는데 3~4개월 알려주니 금세 입문, 초급을 떼더라고요. 지금은 유단자가 되었고요. 제 첫 학생이에요. 바둑판 위 이기고 지는 데 집착하는 게 힘들어 바둑을 놓고 떠났던 곳인데, 참 아이러니하죠.
그렇게 훈련하는 입장이 아니라 가르치는 입장에서 다시 바둑을 보니 모든 게 새롭더라고요. 바둑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마음을 다시 되찾았어요. 전문적으로 프로가 되기 위해 대회 성적에 신경 쓸 때는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가르치면서 바둑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거예요.
한국에 들어온 뒤, 이세돌 교실에서 주로 6~7살 미취학 아동들과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문 / 초급반을 맡았었어요. 바둑연구소에서도 강사로 일했었고요. 지금은 주로 직장인, 성인들 개인 레슨을 하고 있어요.
'대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주입식은 절대 금지예요. 암기해야 하는 것들도 분명 있긴 하지만 그렇게 머릿속에 그냥 욱여넣으면 정작 가장 중요한 '응용'이 안되거든요. 그래서 서로 질의응답하고 토론하는 방법을 선호해요. 정답이 없는 거죠.
한 판이 끝나고 함께 복기를 할 때도 그냥 설명을 쭉 드리지 않아요. 질문도 많이 하고 많이 들어요. 학생 스스로 경기의 판을 뒤집은 첫 단추, 첫 수를 찾아보도록 하는 것, 그게 어려우면서 정말 중요한 거예요. 사실 커뮤니케이션 학과도 제 적성에는 잘 맞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수업하는 것도 다 사람과 사람 사이 대화이기 때문에 즐겁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바둑 판 위가 아니라 바둑 판 너머 사람을 보려 해요. 바둑판을 중간에 매개로 두고 그 건너편에 있는 사람에 관심을 기울이는 거죠. 사실 바둑을 <수담(手談) : 손으로 하는 대화>라고 하잖아요. 저도 예전에는 이기느냐 지느냐에 집착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에요. 고서에 나오는 "바둑에 희로애락이 있다", "바둑에 굴곡이 많다" 등 이런 옛말들도 사실은 바둑알의 움직임 자체가 아니라 그 바둑알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해 배워가는 것에 대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물론 저도 아직 이를 통달한 건 아니지만요!
특히 바둑은 6살 유아부터 할아버지까지, 정말 모든 연령대가 즐길 수 있잖아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새롭게 알아갈 수 있고, 바둑이라는 게임을 매개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에요. 바둑을 즐겨 두면 사회성이 좋아진다니까요.
레슨은 6~7명 정도 진행하고 있어요. 온라인 바둑으로 제자들 코칭도 많이 하고요. 또다시 바둑 공부도 하고 있어요. 예전에 했던 것들을 더 효율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한 번씩 더 되짚어보고 있어요. 프로 선수들 게임도 보고 공부할 작전이 있으면 수업 교재도 보강하고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점인 것 같아요. 바둑 교실, 바둑연구소에서 일할 때는 아이들을 많이 가르쳤었는데 지금은 대학생도 있고, 나이 지긋하신 분도 계시죠. 또 워낙 돌아다니는 게 체질이기도 하고요. 한 공간에 얽매여서 수업하는 게 아니니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새로운 분들 만날 수 있어 즐거워요.
바둑인들의 축제 같은 바둑 대회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경쟁에 집착하는 기존 대회와는 완전히 다르게요. 사실 미국, 유럽 등 해외에는 이런 바둑 페스티벌이 이미 있어요. 바둑 최강국이라 불리는 한국에는 없어요. 국내에서는 보통 1~2일에 걸쳐 예선, 본선, 준결승, 결승 이렇게 시합만 하고 끝이죠. 유럽에서는 2주 정도 시합도 하면서, 또 한 쪽에서는 함께 놀고, 마시고 놀고,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공간도 있는 그런 대회가 매년 개최돼요. 매번 다른 유럽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에요.
사실 제 지인들을 초청해서 비슷한 형태의 대회를 작게 열어본 적이 있어요. 예산과 규모만 더 크다 뿐이지, 방법은 대충 알겠다 싶긴 해요. 저와 같은 세미프로 분들도 많이 초대해서 서로 친해지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의미 있는 행사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사실 한국에 프로 바둑 기사가 되려 준비하시다가 일반 회사에 취업해서 다니시는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같은 분들도 꽤 많으시거든요. 바둑인들이 한데 모여 좋아하는 바둑을 두고, 일반인들도 바둑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그런 장을 많이 열 수 있다면 정말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숨고에는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시작을 먼저 경험한
고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