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숨김 Mar 19. 2020

자각과 상실

감각, 11 OCT @ 섬

1.

슈테판은 어릴 때의 사고로 후각을 잃었다. 너무 어릴 때 잃어서 그 사고 이후로는 향을 맡아본 적이 없는 데다, 후각이 없다고 해도 사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딱히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자라왔다.


봄이 되면 동네에 흐드러지게 피는 향긋한 꽃향기도, 가족들과 함께 놀러 갔던 바다의 짠내도, 비가 내린 후 촉촉히 젖은 나뭇잎에서 나는 비 냄새도 슈테판에게는 그저 예쁘고 좋은 풍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꽃들이 가득한 화단 아래 강아지들이 몰래 남기고 간 배설물의 냄새라던지, 바닷가 근처 시장의 생선 비린내, 가을 단풍이 지나간 자리에 떨어진 은행의 고약한 냄새 등 사람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장점은 어릴 때 슈테판을 달래고자 부모님이 말씀해주신 것이었고, 나쁜 냄새에 대한 경험이 없는 슈테판은 그냥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어딘가로 시선을 보내면 그곳에 냄새의 근원지가 있곤 했기 때문에 슈테판은 눈치껏 알아차리고는 그 위치를 피하곤 했다. 사실 어릴 때는 씻는 것을 귀찮아해서 종종 씻지 않고 학교에 가곤 했으나 같은 반의 좋아하는 여자애 옆에 앉았을 때 그 애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씻지 않은 날이 없었다. 주변에 후각이 없는 것은 자신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며 늘 주의를 기울여 왔기 때문에 학생 시절부터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들 또한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후각이 없는 것은 장애도 아닌 데다,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알아차릴 일도 없었기 때문에 가끔씩은 가족들이나 자기 자신조차도 후각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 정도로 후각이 없다는 것은 슈테판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마치 몸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난 점 같은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는 향 외에 다른 사람에게서 나는 향이 자신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슈테판은 연애를 하면서 깨달았다. 대학 시절 사귀게 된 여자 친구를 친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기 전까지만 해도 슈테판은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중에 따로 만난 친구들이, 슈테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그녀에게서 악취가 난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한증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는데 너는 괜찮냐고, 친구는 걱정되는 얼굴로 말했다. 사실 그것은 슈테판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슈테판은 한 번도 그 냄새를 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친구에게 여자 친구가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 정도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왠지 그다음부터 잠자리를 할 때마다 그는 친구들의 그 말이 생각나서인지 맡지도 못하는 악취가 어디선가 진동하는 것만 같이 느껴져 더 이상 관계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슈테판에게 다른 성적인 문제가 있다고 오해를 하고는 심지어 그것조차 이해해주려고 노력했지만 둘은 얼마 안 가 곧 헤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여자를 만날 때마다 그는 친구들에게 먼저 소개를 시켜주며 검증 아닌 검증을 하는 습관이 자기도 모르게 생겨버렸다.


2.

친한 친구의 생일파티에 간 슈테판은 그곳에서 소피를 알게 되었다. 비슷한 시간에 도착해 입구에서 마주친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는 파티 내내 그녀와만 이야기를 나눴고, 그들은 곧이어 서로 공통점이 많고 음악 취향 또한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파티가 끝날 때쯤에는 이미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았을 정도로 서로에게 운명 같은 깊은 끌림을 느꼈다. 이미 친한 친구의 파티에서 만난 그녀이기에 따로 검증할 필요도 없었는 데다, 자기 친구들 모두 소피를 좋아하고 친한 사이였기에 도대체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휴일엔 미술관에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클럽보다 공원에 하루 종일 누워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직업은 요리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피는 요리와 음식을 매우 사랑했다. 지역에서 생산된 신선한 식재료들을 공수해 재료 고유의 향과 맛을 살리는 감각적인 요리로 유명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그녀는 주변의 환경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소피는 그야말로 맛을 느끼고 음미하는 경험을 사랑했다. 음식을 한 입 넣고 오물거리며 첫인상과 끝맛, 잔향을 맛보고, 그 모든 과정을 이야기하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할 때의 소피는 누구든 사랑에 빠질 정도로 눈을 반짝거리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고 슈테판은 맞장구를 치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녀를 만족시켜주고 싶었던 슈테판은 맛있기로 유명한 레스토랑을 찾아다녔고, 그러다 보니 당연한 절차로 그들은 매번 데이트를 할 때마다 리스트를 만들어 맛집 탐방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핑크빛으로 순조로웠다. 얼마 전 다섯 번째 데이트까지는 말이다.


후각이 없다는 것은 곧 향기 또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미각에도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 슈테판에게 있어 맛있는 음식은 사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배고파서 때가 되면 먹는 것이 음식이었고, 남들이 다들 맛있다고 극찬하는 음식을 먹어도 그에겐 보이는 것 외에는 평범한 음식의 맛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아무리 맛이 없는 음식도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슈테판은 먹을 수 있었다. 맛을 느끼지 못한다고 배도 고프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굳이 후각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결핍에 대해 알아채는 일 따위는 없었다. 누구나 하나쯤은 그런 점이 있지 않은가?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딱히 말하지도 않는 것.

하지만 소피를 만나게 되면서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친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딱히 비밀 같지도 않은 자신의 결함을 털어놓아야 하는 것인가, 또 털어놓게 되면 소피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만약 자신이 말하기도 전에 소피가 알아채고 물어보면 어떻게 반응할지도 걱정이었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슬쩍 얘기할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항상 타이밍이 맞지 않거나, 기회가 생기면 저 아래 있던 두려움이 불쑥 얼굴을 내밀어선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자기랑 맞지 않는 것 같다며 날 떠나버리면? 하고 음침하게 묻는 바람에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남은 계속 지속되었다.


다섯 번쯤 만났을 때 그녀는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해 직접 요리를 해주었다. 그는 와인샵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특별히 추천받은 레드와인과 함께 식전주로 마실 화이트 와인을 골라 가져 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주방에서 바삐 요리를 준비 중이었고, 바쁜 그녀를 대신해 그는 찬장에서 와인잔을 꺼내 와인을 따라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맛을 본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로 보아 와인이 맘에 들은 것이리라. 이 분위기대로만 간다면 오늘은 드디어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그는 기대했다.


마침내 식탁에 요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소피가 직접 개발한 신선한 드레싱을 뿌린 으깬 오이 샐러드였다. “어때?” 기대감에 찬 눈을 반짝거리는 소피에게 슈테판은 우물거리던 오이를 삼키고 대답했다.

“응, 오이를 으깨서 그런가, 식감이 좋네. “

“드레싱은 어때? 이번에 새로 개발한 거야.”

사실은 전혀 맛을 느낄 수 없었지만, 슈테판은 대답했다.

“으깬 오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정말 맛있다!”

소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요리는 얇게 저민 트러플과 바질 소스가 뿌려진 관자요리였다. 역시 맛이 어떠냐 묻는 소피에게 슈테판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식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연이어 무청이 들어간 오일 파스타와 그릴에 구운 소고기 스테이크를 내온 소피는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특별히 실험적으로 넣은 향신료들이 있어서 반응이 어떤지 궁금해, 맛이 어떤 것 같아?”

요리를 해주는 사람들이 으레 궁금해하듯이 소피 역시 자신이 한 요리에 대한 슈테판의 반응이 궁금한 듯했다.


"특별히 느껴지는 것 없어?"

이런 질문을 충분히 예상하긴 했지만 사실 전혀 맛을 느낄 수 없는 슈테판은 너무 맛있어서 말이 안 나올 정도라는 듯 눈알을 굴리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고,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대답했으며, 소피가 그 답에 대해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디저트로 호두와 견과류가 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소피가 물었다.

“너 혹시... 음식의 맛을 못 느끼는 거야?”

그녀의 질문을 들은 순간 슈테판은 긴장했다.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말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문제는 슈테판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라는 것이었다. 마치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시험이 갑자기 닥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슈테판은 매우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입 안에 머금은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녹여 삼키곤 대답했다.

"사실 나는... 맛보다도 냄새를 맡지 못해."

잠시 망설이던 그는 소피에게 자신이 어렸을 때 사고로 후각을 잃었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었는지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지금까지는 이것이 자신에게 문제로 느껴진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닌 말하지 못했던 것임을, 그리고 지금까지 그 어떤 친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까지도.

슈테판의 이야기를 듣으면서 소피의 눈은 커졌다가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고, 입이 벌어졌다가 이내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주먹을 꽉 쥔 그의 손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곤 이야기를 끝낸 슈테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네 말대로 이건 문제가 아냐, 다만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널 배려해줄 수 있었을텐데. 문제로 느끼게 해서 오히려 내가 미안해...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소피의 반응에 슈테판은 강한 안도감을 느꼈다. 막연하게 그녀가 이해해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야기를 하면서도 본인이 이렇게 긴장할 줄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힘겹게 느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지금까지 거짓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네 요리는 정말 맛있어! 내가 맛을 느끼진 못하지만 식감은 느낄 수 있다구. 네 덕분에 건강도 더 좋아졌고..."

"그래, 앞으로는 내가 식감을 좀 더 신경쓴 요리도 개발해볼께, 어쩌면 너에겐 자극이 필요한 것일지도 몰라, 나도 어떤 요리사가 후각을 잃었다가 강한 허브 덕분에 다시 되찾았다는 기사도 얼핏 읽은 적 있거든. 다른 건 몰라도 네가 맛있는 음식을 즐기면서 먹을 수 있도록 내가 최대한 도울게!"

미소를 지으며 소피가 말했다. 잠시 손을 맞잡고 있던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갑자기 슈테판은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고 그날밤 슈테판은 원하던 대로 그녀의 집에서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3.

꿈만 같은 나날이 지속되었다. 슈테판은 그야말로 소피에게 푹 빠져 매일같이 퇴근길에 그녀의 레스토랑에 들러 함께 그녀의 집 또는 그의 집으로 향하길 반복했다. 소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조건 하에 말이다. 소피 역시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소피에게는 일 또한 중요했고, 어느정도 둘의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녀는 삶과 일의 균형이 중요하다며 가끔은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기꺼이 존중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소피에게 요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그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느날부터인가 그녀는 요리 연구 때문에 다음 날에 만나자고 했고, 점점 그런 날이 일주일에 한번, 그 다음 주에는 두번, 세번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주말에는 항상 함께했지만, 어느날 저녁, 매일같이 함께 하던 나날 이후 갑자기 그녀가 없는 시간을 보내려니 혼자있는 자신의 집이 너무나도 허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꾹 참고 저녁을 챙겨먹었다. 소피와 함께 만든 오픈 샌드위치였다. 따뜻한 차를 우려내어 같이 먹으니 허기졌던 배는 채워졌지만 그의 마음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거실 소파에 기대어 티비를 켜고는 영화채널을 둘러보았다. '앗, 저거 소피가 말했던 영화인데. 나중에 같이 봐야지, ' 하고는 찜해놓고 시계를 보았다. 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갔을까? 아니지, 집에 가는 중이면 연락을 했을 텐데. 아직 집에 안갔으면 데려다주겠다고 할까? 그래,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괜찮잖아. 연락하지말고 가서 깜짝 놀래켜줘야지.

슈테판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외투를 집어들고 후다닥 집 밖으로 나왔다. 소피의 레스토랑은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뛰어가면 20분 내에 도착하는 거리였다. 숨차게 뛰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매우 경쾌했다.


이윽고 코너를 돌아 그녀의 레스토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소피가 막 레스토랑의 문을 닫고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후다닥 뛰어간 그는 살금살금 걸어가 가방에서 열쇠를 찾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워! 서프라이즈-"
깜짝 놀란 소피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반가우면서도 왠지 어설프게 굳어있었다.

"깜짝이야! 슈테판, 어쩐일이야? 우리 오늘은 만나는 거 아니었잖아."

"아, 왠지 너가 레스토랑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외로울 것 같아서, 내가 집까지 모셔다주려고 했지. 하하!"

그때 레스토랑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소피, 열쇠 여기있..... 아, 안녕하세요. 누가 오셨네." 누군가 나오며 소피에게 열쇠를 건네었다.

슈테판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누군데 소피의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거야?

소피가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슈테판, 인사해, 여긴 막스, 나랑 르 코르동 블루 동기이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일하고 있어. 그리고 이쪽은 슈테판. 내 남자친구야."

막스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막스입니다."

남자친구라는 소개에 조금은 마음이 풀린 슈테판이 얼떨결에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받았다.

"네, 슈테판입니다. 둘이 같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슈테판이 소피를 쳐다보았고, 소피가 잠시 우물쭈물하자 지켜보던 막스가 대답했다.  

"아, 소피가 얘기 안했나보네요. 소피가 신메뉴 개발 때문에 도와달라고 해서 제가 잠깐 짬내서 왔어요. 저는 이만 집에 가봐야 해서... 그럼 소피, 내일 모레 다시 올게. 다음에 또 뵐게요."

막스는 인사를 하고는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슈테판은 왠지 기분이 불쾌했다. 왜 나에게 얘기를 안한 거지? 하지만 소피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슈테판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소피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르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소피 역시 늘 그렇듯 오늘 레스토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고, 이 일에 대해선 더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슈테판은 미소를 띄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왠지 그녀가 평소보다 과장되게 수다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막스를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슈테판은 소피가 요리연구를 한다고 하는 날이면 괜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것을 무시하려고 애썼으나, 자꾸만 불안감과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슈테판이 무색하게 소피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둘이 함께 있을 때에는 오직 그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에 딱히 그녀의 마음이 변했다거나 하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다만, 왠지 점점 연락의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저녁 그때처럼 소피가 요리 연구를 한다고 했고, 슈테판은 알겠다고, 응원 문자를 보내고는 바로 집 밖으로 나섰다. 레스토랑 밖에서 몰래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녀의 레스토랑 주방은 건물의 중정 쪽으로 창문과 다른 입구가 나있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창문 너머로 주방을 살짝 들여다볼수가 있었다. 레스토랑 직원들은 종종 그 중정 쪽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슈테판도 몇번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한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살금살금 중정 안에 있는 뜰로 들어선 그는 주방 창문 쪽으로 걸어가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는 소피가 안에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고, 뭔가를 튀기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기름이 튀었는지 소피가 갑자기 "아!"하고 외치며 손을 얼굴 쪽으로 향하자 슈테판은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괜찮아? 그러니까 장갑을 끼고 넣었어야지!" 막스의 목소리였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주방에는 막스가 있었다. "어디 봐바, "하고 말하며 막스가 그녀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갔다. 모든 걸 지켜보던 슈테판의 마음 속에 불길이 일었다. 슈테판 쪽에서 소피는 뒷모습만 보여서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었지만, 막스의 표정은 분명하게 보였다. 막스는 분명히 소피에게 마음이 있는 상태이다, 라고 슈테판은 99% 확신했다. 이로서 자신이 신경쓰이고 불안한 이유는 명확해졌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주방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었지만 슈테판은 꾹 참고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며 아무래도 소피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낸담? 고민하면서 터벅터벅 걷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4.

"...... 그랬더니 글쎄, 레나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만약 그 사람이 미슐랭 심사위원이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그러는 거 있지. 심사위원이 왜 하필 시그니처도 아니고 그런 평범한 메뉴를 시켰겠느냐고 말야. 웃기지 않아?"

평소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소피를 바라보며 슈테판은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타이밍에 막스 이야기를 꺼내야하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꺼내고 싶은데. 하지만 동시에 최대한 그녀의 말에 집중하려고 애써 노력하며 슈테판은 대답했다.

"미슐랭 심사위원이면 자기가 심사위원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자 소피가 입을 딱 벌리곤 말했다.

"너 모르는구나? 미슐랭 심사위원은 해마다 비밀에 부쳐져 있어. 몰래 찾아와서 먹고 가서는 점수를 매긴다고. 그래서 나름 공평한거야. 물론 요새는 다 짜고치는 판이라는 얘기도 있고, 미슐랭 스타를 거부하는 셰프들도 있지만, 나는 한번쯤은 평가받아보고 싶어. 그래서 요리연구도 하고 있는 거고."

요리 연구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슈테판은 이때다 싶어 바로 소피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막스랑 요리 연구는 잘 되가? 항상 같이 하는 거야?"

그러자 소피가 대답했다.

"응, 내가 발전시키고 싶은 요리가 있는데 그게 막스가 잘하는 분야거든. 그래서 내가 배우고 있어. 동기라서 다행이지, 그거 어디가서 배우려면 수업료도 꽤 비싸거든. 시간도 잘 맞춰주고. 다행이지 뭐. 참, 안그래도 막스가 언제 한번 너랑 같이 밥먹자고 하더라. 언제 만나면 좋을까?"

얼떨떨한 기분으로 슈테판이 대답했다. "나랑? 왜?"

"그냥, 내 남자친구고 얼굴도 봤으니까? 가볍게 한끼 하는거지 뭐. 다음주 금요일 저녁 어때?"

뭔가 적에게 역공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슈테판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다짐했다. 그날 기필코 그의 진심을 들어야겠다고.


드디어 금요일 저녁이 되었고, 셋은 동네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나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둘이 만난 지는 얼마나 된 거예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데."
막스가 물었다. 소피가 대답했다.

"한 두달 정도 됐나? 그래도 우리 거의 매일같이 만났어서 벌써 왠지 엄청 오래된 커플같은 기분이 들긴 해. 안정적인 느낌이랄까. 난 그게 좋더라고."

"안정적인 느낌 중요하지, 서로 이해해주고 존중해주고. 우리 동기들 중에 한나랑 요나스알지? 걔네도 만난지 꽤 됐잖아, 곧 결혼한다더라. 너도 갈 거지?"

"응, 안 그래도 한나가 얼마전에 연락왔더라고. 당연히 가야지!"

슈테판은 왠지 이 자리에 덤으로 끼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있긴 했지만 둘의 학교 이야기나 요리 이야기에 그는 끼여들 수가 없었다. 말없이 앉아 나온 요리들만 먹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려니 왠지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소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남자는 약간 어색하게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필코 그의 진심을 듣겠다고 다짐한 것과는 달리 막상 막스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려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포크로 파스타를 뒤적거리는 슈테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막스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에 머스캣이 좀  많이 들어가 있어서인지 향이 진해서 좀 텁텁하던데, 맛 괜찮으세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슈테판이 살짝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거렸다.

"아, 네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파스타 맛이 뭐 다 비슷하죠."

그러자 막스가 혼잣말처럼 아 하긴, 향을 못 맡으시니까, 라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슈테판은 뒷골이 서늘해지는 분노를 느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뭐라고요?" 

슈테판이 되물었다. 그러자 막스가 순간적으로 놀라며 아, 향이 강하다고요. 하고 고쳐말했다. 분명히 저 말이 아니었는데. 내가 후각은 없어도 청각은 아주 뛰어나다고, 이 자식아. 슈테판은 자기도 모르게 막스에게 공격하듯이 말을 던졌다.

"소피에게 들으니 많이 도와주신다고 하더라고요. 시간도 소피에게 전부 다 맞춰주기까지 하시면서. 레스토랑 셰프라고 하시던데 시간이 많으신가봐요?"

그러자 막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그는 슈테판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또렷하게 말했다.

"제가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고 한 건 소피의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였어요. 제가 사실은 학교 같이 다닐 때부터 소피 좋아했었거든요. 졸업 때쯤 고백했었는데, 보기좋게 차였죠. 소피가 인기가 많기도 했지만, 워낙 다정하고 착해서 종종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거든요. 아무튼 저는 여전히 미련이 있고, 소피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생각지 못했던 직구에 슈테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막스의 이어진 말은 더더욱 그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소피가 요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죠? 맛보고 느끼고, 감각하는 것에서 얼마나 영감을 얻는지도요. 결국은 소피도 자신이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원하게 되지 않을까요?"


레스토랑을 나와 헤어진 그들은 각자 반대방향으로 흩어졌다. 슈테판은 소피와 걸으면서 막스에 대해 물었다.

"소피, 막스를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슈테판이 걸음을 멈추고 소피를 마주보며 말했다.

"솔직하게 얘기해줘. 막스에게 배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요리연구를 한다고 할때마다 연락이 없잖아, 둘이서 무슨 일이 있는지 나는 전혀 알수가 없다고...”

슈테판의 말을 듣던 소피는 실망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날 못 믿는거야? 나는 정말 요리 연구때문에 막스를 만나는 거야, 다른 마음은 전혀 없다고! 물론 우리가 학교다닐때 막스가 나한테 고백을 한적은 있지만 지금 우린 그냥 동료이고 친구일 뿐이야. 나는 너랑 만나고 있고 심지어 너가 불안해할까봐 남자친구라고 소개도 했는데 왜 의심하는거야? 내가 그런 사람처럼 보여? 정말 실망스럽다.”

감정이 격해진 둘은 결국 말다툼을 하고 말았고, 서로 좋지 않은 기분으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5.

막스와의 저녁식사 이후로 슈테판은 강한 우울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자신에게 후각이 없는 것이 이렇게 슬펐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소피는 계속해서 연락이 없다가 슈테판이 연락을 하자 그때서야 답이 왔다. 파리로 2주간 출장을 가니 돌아와서 보자는 내용의 문자였다. 2주를 어떻게 기다리나, 하고 달력을 보니 2주 후면 그의 생일이었다. 정신이 없어서 생일이 다가오는 것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생일날 소피와 함께 근사한 곳에 가고 싶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혼자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절망에 빠진 슈테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다가 문득 컴퓨터를 켜서는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후각 수술, 병원.'

검색을 통해 슈테판이 알게 된 사실은, 후각 장애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냄새가 전혀 맡아지지 않는 후각 소실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종류들도 겉보기에는 다른 것 같아보이지만 결국은 후각이 완전히 상실되는 과정 중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이었다. 후각장애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증상 자체보다 원인이 무엇인지가 중요한데, 슈테판의 경우 사고의 후유증으로 두개골 골절으로 인한 후신경이 손상된 경우인데다 너무 오래되어서 치료시기가 늦어 수술을 해도 성공률이 낮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여러 곳을 알아본 후 병원을 찾아다니며 상담을 했고, 검사를 받았다. 의사들의 의견 대부분은 그가 후각을 잃은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수술을 해도 완벽히 돌아오긴 힘들 거라며 부정적이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소피가 돌아오기 전에 달라진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하고 싶었다. 

".....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당시 뇌 조직과 신경의 손상이 워낙 심했어서 후각기능이 되살아나기는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혹여나 만약 후각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 냄새를 분석할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환자분이 그토록 원하시니 한번 시도는 해보도록 하죠."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의사에게 찾아갔을 때, 의사가 이렇게 말하자 슈테판은 아주 가느다란 희망의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거라는 의사의 말에 바로 그 주에 수술 날짜를 잡았고,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술날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수술날이 되었고, 전날부터 입원해있던 슈테판은 자신의 병실로 의사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오전 8시쯤 의료진들과 함께 찾아온 의사는 슈테판의 침대를 수술실로 옮겼고, 긴장한 얼굴로 수술실을 둘러보는 슈테판을 보며 물었다. 

"긴장되세요?"

"네, 조금..."

"그냥 한숨 자고 일어난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사실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으니까요. 일단 신경이 어느정도 손상되었는지, 회복이 가능한 정도인지 살펴보고 신경연결을 시도해 볼 겁니다. 그럼 마취 시작합니다."

의사 뒤에서 대기하던 간호사들이 주사를 의사에게 건네었고, 팔에 따끔한 느낌이 들더니 서서히 슈테판의 시야가 흐려졌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그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슈테판이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오후였다. 창문의 블라인드 사이로 강한 햇빛이 들어와 벽에 줄무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희릿하게 보이는 병실의 벽에 걸린 시계바늘이 3시 20분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왠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손끝에 힘을 주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번엔 발가락. 움직이는 것이 매우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깜박거리며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병실에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소피가 자신의 옆 간이침대에 곤히 잠들어있었다. 화들짝 놀란 슈테판은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다. 아무 얘기도 안했는데, 소피가 어떻게 여기에 와있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인기척을 느낀 소피가 잠시 뒤척이다 눈을 떴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소피가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슈테판? 몸은 좀 어때? 내 말 들려?"

"응, 머리가 좀 멍하긴 한데 괜찮은 것 같아... 근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출장은?"

몸을 일으키려는 슈테판을 말리며 소피가 말했다. 

"아직 일어나지마, 회복이 덜 되서 조금 더 입원해있어야 한다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어. 출장 일정이 생각보다 짧게 끝나서 돌아오자마나 너한테 연락했는데 종일 전화가 안되더라고. 너무 걱정되서 너희 집도 가보고, 계속 전화했는데 갑자기 누가 전화를 받더니 병원이라는 거야. 너가 휴대폰을 끄는 걸 깜박한 것 같다고. 깜짝 놀라서 여기로 왔지... 그나저나 수술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했어."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소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슈테판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안고 토닥거려주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대신 그녀의 손을 느리게 잡고 도닥거렸다. 

"난 네가 수술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어, 너가 후각이 없다는 건 나한테 아무 상관 없는데, 괜히 내가 부담을 줬나 싶어서 얼마나 자책했는지 몰라... 사실 요리 연구도 널 위한 깜짝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란 말야, 그래서 너한테 말 못한 거라고. 막스한테 급하게 도와달라고 한 것도 너 생일이 얼마남지 않아서 그 전에 연구를 마무리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 절대 오해하게 하려고 한 게 아냐. 그래도 이런 생각까지 하게 해서 미안해..."

울먹거리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슈테판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울고 있는데 왜 웃음이 나는 건지. 뇌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그리고 그는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여전히 그의 후각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사실을.

"혹시 의사선생님 좀 불러줄 수 있어? 내 수술 결과를 듣고 싶은데."

소피는 잠시 멈칫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그게..... 일단 좀 안정을 취해야한다고 하셨어. 수술 결과는 아마 곧 알려주실 거야, 좀만 기다려보자. 일단 이번주까지는 입원해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나도 내 짐 좀 챙겨서 좀 이따 다시 돌아올게. 전화받고 정신없이 와서 너 깨어나는 거 기다리느라고 집에 못 갔거든."

소피는 슈테판의 뺨에 키스를 한 후 짐을 챙겨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문 뒤로 사라지자 슈테판은 한숨을 쉬었다. 왠지 수술은 잘 된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있는 듯 했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고 하긴 했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슈테판은 깨달았다. 기대만큼 크나큰 실망감에 그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일주일을 더 입원해 안정을 취했다. 혹시나 있을 수술후유증을 대비해서였다. 그가 깨어나고 다음날 의사는 그의 병실을 찾아와 수술이 실패했음을 알렸고, 그의 후신경이 생각보다 손상도가 심해 최소한의 연결외에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경고를 했었고, 만약 실패한다 하더라도 슈테판 자신이 시도하기를 원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의사의 잘못은 아니었다. 입원해 있는 한주 동안 소피는 계속해서 그의 병실을 들락거리며 회복에 좋다는 음식을 만들어왔다. 그녀와의 관계가 다시 원상태로 회복된 것만으로도 슈테판은 행복했다. 얼른 퇴원해 그녀와 함께 집으로 가고 싶었다. 


6. 

일주일 후 슈테판은 그의 생일 전날 퇴원했다. 생일이기도 하고 퇴원 기념으로 그는 소피와 근사한 곳에 가서 저녁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소피는 퇴원은 했어도 무리하면 안된다며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했다. 자신의 요리를 먹여야 안심이 될 것 같다며. 슈테판은 알겠다고 하고는 소피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레스토랑의 불이 꺼져있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영업을 안하는 건가? 그는 소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파우치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어주고는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안쪽에서 불빛이 켜지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서프라이즈-!"

"슈테판, 생일 축하해!" 

슈테판의 친한 친구들이었다.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소피가 그 몰래 그의 친구들을 초대한 것이었다. 한쪽에는 입을 비죽거리며 서있는 막스도 보였다. 축하해주는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그런 막스를 발견한 슈테판은 슬쩍 웃었다.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다 함께 홀의 가장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동안 소피는 막스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요리를 하나씩 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슈테판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하게 만든 코스요리입니다- 먼저 전채요리부터 시작합니다!"


소피의 소개로 시작된 에피타이저는 아스파라거스와 토마토가 버무려진 샐러드였는데, 플레이팅이 아주 특이했다. 토마토가 마치 큐브처럼 썰어져있고,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엔티쵸크, 그리고 표고버섯 위로 뿌려진 소스가 동글동글하게 열매처럼 맺혀있었다. 색을 보아하니 종류가 3종류는 되어보였고, 각 야채의 식감과 맛이 어우러져 뭉근하지만 끝맛이 단정하면서 상쾌했다. 

두번째 코스는 각종 버섯 요리였다. 쫄깃쫄깃한 버섯들과 살짝 튀겨진 버섯들의 식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튀긴 버섯의 바삭한 식감을 처음 느껴본 슈테판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다른 손님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버섯들 옆에 함께 나온 야채가 든 소스는 살짝 끈적끈적했는데, 바삭한 느낌과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소피가 말했다. 

"다들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코스 요리의 특징은 식감이예요. 요리를 맛보실 때마다 살짝 눈을 감고 맛과 함께 재료의 식감을 한껏 음미해보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아하~하는 반응들이 들렸고, 그녀의 소개는 다음에 나올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세번째 요리는 푸아그라였다. 부드러운 갈색 푸아그라 위에 가니쉬로 카라멜라이즈드 된 양파, 말랑한 무화과, 슬라이스된 빨간 무, 그리고 피스타치오 등의 넛이 뿌려진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입 안에서 갖가지 재료들이 부드러움과 아삭함의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식감의 향연이 벌어졌다.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은 각자 눈을 지그시 감고 맛을 음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치 생일파티에 초대받아왔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듯했다. 

네번째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새우와 관자요리였다. 앞서 나왔던 푸아그라의 부드럽게 뭉개지는 맛과 상반된 식감의 해산물들과 함께 미끌미끌한 감칠맛이 혀에 감돌며 마비를 시키는 느낌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앗, 하는 반응들이 흘러나왔고, 그 모습을 지쳐보던 막스가 나와서 말했다. 

"혀에 살짝 아릿하게 자극이 올 텐데요, 이것은 중국요리에 들어가는 '마'라는 향신료입니다. 살짝 매콤하면서도 왠지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이 아주 중독적이죠. 하지만 곧 사라지니까 안심하세요."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요리도 입 안에 이렇게 다양한 감각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경험에 슈테판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록 향을 맡지 못해도 이렇게 맛이 다채롭게 느껴질 수가 있다니. 

메인으로 나온 스테이크는 옆에 구운 방울양배추와 토마토들이 동글동글하게 색색깔로 어우러져 있었고, 위에는 동그란 무피클과 함께 크럼블 후레이크가 올려진 위로 끈적한 양파소스가 흩뿌려져 있었다. 크럼블은 왠지 까끌까끌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왠일인지 입에 들어가자 고기의 육즙과 함께 스르륵 사라졌다. 보이는 것과 다른 맛과 식감에 손님들은 연달아 감탄하기에 바빴다. 슈테판은 소피가 자랑스러웠다. 

이어서 상큼한 바질 셔벗, 입에 대기만 해도 사르륵 녹아버리는 구름같은 솜사탕 위에 올려진 색색깔의 모양들이 혀끝에서 감도는 머랭, 차가운 치즈아이스크림에 바삭거리는 애플크럼블을 얹은 디저트들이 연달아 나오고, 슈테판의 생일을 기념한다는 메세지가 레터링된 만델 비넨슈티히(Mandel Bienenstich : 독일의 전통케이크. 아몬드 벌꿀케이크)에 촛불을 켜서 다함께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소피가 슈테판의 옆에서 키스를 하며 축하한다고 말했고, 슈테판은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수술이 잘 안되어서 오히려 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만약 수술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슈테판이 느끼는 이 행복감은 절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코스 요리가 끝나고 디저트를 먹으며 시끌벅적해진 가운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던 슈테판은 몰래 자리를 떠나려던 막스를 마주쳤다. 

"아, 가시려고요?"

막스가 슈테판에게 멋쩍게 다가와 말했다.

"아, 이거 들켰네요. 뭐 저의 임무는 다한 것 같아서요. 내일 출근도 해야하고..."

"좀 더 있다가 가시지 그래요. 오늘 너무 수고하셨는데요."

아닙니다, 라고 말하며 뒤통수를 긁적이던 막스가 슈테판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때는 미안했어요, 소피가 너무 행복해하는 것 같아서 괜히 질투가 나서 그런 말을 했네요. 사과합니다." 

"아닙니다, 소피를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오늘 요리 너무 맛있었고 무엇보다 식감이 너무 좋았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메뉴 개발은 소피가 전부 했는걸요. 이건 메뉴로 만들어서 팔아도 될 것 같아요. 생일 축하드려요!" 

축하 인사를 건넨 후 막스는 그만 가야겠다며 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보였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슈테판은 다시 홀로 들어왔다. 홀의 안쪽에 있는 소파에서 소피가 그의 친한 친구들과 모여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7. 

"이것 봐, 우리 레스토랑이 미슐랭 스타에 소개되었다고 기사가 났어!"

인터넷으로 기사를 찾아 읽던 소피가 호들갑스럽게 슈테판을 불렀다. 소피를 위해 주방에서 차를 끓이던 슈테판은 방으로 달려와 소피를 높이 들어올려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축하해! 역시 그 사람이 심사위원이었나보네. 잘됐다, 정말!"

"응, 최근에 신메뉴 오픈하고 나서 그 사람이 또 왔었거든. 혼자서 전체 코스요리를 시켜서 다 먹고 갔다니까."
슈테판의 생일파티 이후 파티에 초대되었던 손님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은 소피는 그날의 코스를 더 보완하여 레스토랑에서 메뉴로 팔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부터 매출이 두 배 이상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심사위원이 또 와서는 평가를 하고 간 모양이었다. 

슈테판은 소피와 함께 앉아 핸드폰으로 기사를 읽었다. <살아움직이는 식감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요리, 새로운 별이 되다>. 기사의 제목이었다.  

슈테판의 품에 안겨있던 소피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는 말했다. 

"이게 다 네 덕분이야, 슈테판. 진심으로 고마워." 

"무슨 소리야, 다 네가 개발한 요리들인데! 나야말로 고마워. 나도 그런 경험은 정말 처음 해보는 거였어, 심지어 맛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고."

"그랬어? 그랬다니 정말 뿌듯하다! 널 생각하면서 만든 요리로 인정을 받게 되서 나도 너무 기뻐. 진짜 다 네 덕분이야... 음.."

잠시 말을 멈춘 소피가 슈테판에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이 다시 왔을 때 어딘가 낯이 익어서 뒷조사를 좀 해봤거든. 알고보니까 그 사람이 원래 요식업계에서 되게 유명한 사업가였더라고. 근데 사고로 후각을 잃는 바람에 사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대. 그래서 후각을 되찾으려고 여기저기로 막 여행다니면서 좋다는 건 다 찾아다녔대나봐. 그러다가 어떤 후각치료사를 소개받게 되서 기적적으로 후각을 되찾고 지금은 맛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이 된 거라는 뒷얘기를 들었어. 그얘기를 들으니까 네 생각이 나더라. 어때? 만약 그 사람이 다시 오면, 내가 그 후각치료사가 누군지 한번 물어볼까? 네가 아직도 다시 후각을 되찾고 싶다면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너가 어떤 이상이 있든 전혀 상관없지만, 만약 너가 원한다면..."


슈테판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내가 원하는 건...."





매거진의 이전글 실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