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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Mar 21. 2020

혼잣말

20 March 2020 @백뻘게

R과 N은 방 두개짜리 집에 함께 사는 룸메이트였다. 함께 산 지 약 6개월이 넘은 그들은 원래 전혀 모르던 사이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만나 함께 집을 계약했다. 단지 조건이 맞았기 때문에 함께 살게 되었을 뿐, 서로 하는 일에서부터 성격까지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둘은 서로를 배려하는 동시에 각자의 사생활에 전혀 무관심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삶을 꾸려가는 가는 것에 점차 익숙해졌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사람을 잘 만나는 일이 없고 조용한 성격인 N은 주로 집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직장에 다니지만 주 4일 근무를 하며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 또는 동료들과 어울려 모임을 갖거나 파티를 즐기는 R은 주말에도 놀러다니느라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둘이 함께 살면서 부딪힐 일이 없는 이유는 명백해 보였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R은 새벽 6시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7시면 나가서 5시 퇴근 후 거의 밤 12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왔다. 반면 오전 8시에서 9시쯤 느지막히 일어나 천천히 아침을 먹고 10시쯤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하는 N은 오후 6시면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후 홈 트레이닝을 하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밤 11시면 잠잘 준비를 했다. 때문에 둘은 얼굴을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고, 간혹 부엌에 남은 음식이나, 물컵, 혹은 함께 공유하는 욕실의 욕조에 남아있는 물기로 이 공간에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뿐이었다. 둘의 삶은 묘하게 균형이 맞았고, 마치 톱니바퀴처럼 잘 굴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전세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대부분의 회사들이 재택근무로 돌리고, 거의 모든 기관과 문화공간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자 N과 R 둘 다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었던 것이었다. 처음에 둘은 새삼 같은 시간에 집을 공유하게 된 것이 매우 어색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기상시간을 한번에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R은 여전히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을 먹었고, N 역시 9시쯤 일어나 느지막히 아침을 먹었다. 그 후에는 서로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업무를 보거나, 활동을 했다. 이렇게 일주일쯤 지나가자 둘은 이 새로운 일상의 반복에 또다시 익숙해졌다. 아니, 적어도 R에겐 그랬다. 


N은 R과 함께 산지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이 집의 방음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사실과 함께 함께 자신의 귀가 너무, 소름끼칠만큼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모로 완벽하진 않지만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R에게는 (N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혼잣말이 (매우) 많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의식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만큼, 마치 고양이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N은 소리를 내는 일이 좀처럼 없었는데 그것은 혼자있을 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N의 주변은 늘 거의 정적이 흘렀다. 생활소음조차 거의 내지 않는 타입의 N은 자신의 기억에 따르면 혼잣말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며칠전부터 N이 특히 좋아하던 조용하던 오후 시간에 R의 방에서 그 정적을 깨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항상 정적에 둘러쌓여 왔던 N은 그 소리 때문에 도무지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 그 소음은 오전, 오후, 밤, 모든 시간 예외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R의 혼잣말은 매우 다양했는데, 아침을 먹고 난 후 방에 들어가서도 중얼중얼, 아무소리 없이 조용한 와중에도 갑자기 중얼중얼, 무언가를 보면서도 중얼중얼거렸다. 이것은 시끄럽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결코 조용하다고는 할 수 없는 너무나도 신경쓰이는 소음이었다. 


익숙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어느 날, R은 N에게 문자메세지로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점점 더 퍼지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어떻게 될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견디기 어렵다며, 적어도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라면 이 모든 것을 똑같이 겪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전하면서 부디 건강하게 살아남길 바란다는 응원과 함께. 지금 상황에선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하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N은 일단 그 방을 비워두기로 했다. 게다가 R의 혼잣말이 너무나도 거슬리던 N은 심지어 속으로 환호성까지 지르며, R이 나가기로 한 일주일 뒤까지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얼굴을 마주친 것이 거의 손에 꼽던 둘의 마지막 순간은, 역시 어색했지만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하게 1.5m의 거리를 유지하며 눈을 마주치고 손만 흔들었을 뿐이었다. R이 나간 후 일주일간 N은 다시 고요해진 공간, 다시 되찾은 정적이 너무나도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며칠 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주변 이웃들도 고국에 돌아간 이들이 많아 다수의 집이 비게 되었다. 

전기가 나간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인력이 부족해 전기회사가 제 상태로 운영되기 어려웠던 것이 기어코 터지고야 만 것이었다. 저녁을 먹다 난데없이 나가버린 불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던 N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남은 음식을 먹고, 더듬거리며 방으로 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일어난 정전이었기 때문에 집에는 초도, 손전등도 없었다. 밖은 어두침침했고, 간혹 아직 남아있는 이웃의 창가 너머로 흔들리는 초의 불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정적이 흘렀지만, 이번엔 달랐다. N의 머리 끝부터 어깨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 


N은 처음으로 R에 대해 생각했다. R은 지금 이 순간 뭐하고 있을까,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까? 아니면 어디선가 또 무언가를 보며 중얼중얼, 튀어나오는 혼잣말들을 내뱉고 있을까? R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나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기나 할까? 

참으로 오랜만에 N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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