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2001) / 이와이 슌지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수탉의 머리, 사람의 몸. 다리는 뱀 같으나 군사와 같이 무장한 아브락사스는 신과 악마의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한 세계를 파괴하고 태어난 자는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간다. 이 대목에서 새를 인간으로 치환한다면, 에밀 싱클레어가 젊은 날의 한 부분을 도려내서라도 아브락사스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고자 했던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건만 인간은 성장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는 진리와 규율 그리고 체계가 굳건히 자리잡힌 안전한 차원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계몽'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장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인간은 선구적으로 계몽한 타인을 이상향 삼아 열심히 자신의 세계에 균열을 낸다. 그렇게 알을 깨고 나온 인간은 동경의 대상들 곁으로 가길 희망한다. 이정표와 다름없는 그들이 아브락사스를 택했다면 나 또한 그 대열에 합류해야 마땅하니까.
고로 눈 뜬 자들에게 아브락사스는 진리임과 동시에 끊을 수 없는 연대의 매개체, 자유의 완성 그리고 구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테르가 오버랩된다. 에테르를 불가침한 성역으로 본다면 릴리 필리어의 행태는 광신도 또는 이교도에 가깝다. 앞선 메시아니즘적 관점에서 릴리는 희망으로부터 철저히 추방된 이들을 구원할 메시아로 지목된 것이다.
흰옷을 입은 채로 녹음(綠陰)을 배경 삼아 CDP로 릴리 슈슈의 음악을 청취하는 유이치의 모습은 마치 성경 속 푸른 초장에 놓인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연상케 한다. 릴리의 앨범 제목이 '호흡'이라는 것 또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공교롭다. 동급생 무리의 이지메와 반복되는 일탈 속에서 유이치의 영혼은 서서히 죽어갔으나 신의 호흡이 피조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듯 릴리의 '호흡'은 유이치의 영혼을 소생시켰다. 다시 말해, 유이치는 릴리의 음악을 통해 일종의 구원을 받은 셈이다.
릴리는 말한다. 처음 에테르를 음악으로 만든 사람은 드뷔시와 에릭 사티라고.
그러나 오해는 금물이다. 릴리의 에테르는 누군가의 영향으로 생긴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릴리 슈슈가 그의 삶에 개입하는 과정은 원죄의 전승과 무척 닮아있다. 드뷔시와 에릭 사티가 에테르 음악의 선구자였듯이 릴리 필리어의 시초에는 쿠노가 있었다. 쿠노를 메시아와 접촉한 최초의 인류라고 볼 때, 호시노는 메시아의 에테르를 훼손한 신인류로 해석할 수 있다. 에테르는 무형의 성역이고 오키나와는 실질적인 성역 즉, 에테르가 머무는 낙원이다. 낙원에 훔친 돈이라는 부정함을 숨기고 '침입'한 호시노가 치뤄야 할 죄의 삯은 죽음뿐이었다. 그 죄는 호시노로 인해 타락한 에테르를 이어받은 유이치와 츠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어 그들을 죄와 고통의 길로 이끈다.
마침내 모두가 릴리의 에테르를 공유하게 되는 순간, 세계는 현실과 가상의 두 갈래로 분화한다. 현실의 그들은 저마다의 계급과 폭력으로 점철된 지옥에 고립된 채 처절하게 구원을 갈망하지만 릴리 필리어에 접속하는 순간, 그들은 완전한 연대감에 휩싸인다. 에테르에 눈 뜬 자들에게 현실은 곧 알이다. 강자가 약자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약육강식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아브락사스의, 다른 말로 릴리의 세계를 향해 날아가야만 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신 '하늘을 날고 싶다'고 외치는 츠다의 울부짖음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내 숏은 어지러울 만치 불안정한 핸드헬드 촬영 기법을 통해 모두를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날고 싶다던 츠다의 최후는 추락이었다. 릴리 슈슈를 접하고 에테르를 경험했지만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현실의 고통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한 소녀의 희망이 절망으로 둔갑하니 비로소 릴리 슈슈와 에테르 그리고 아브락사스는 굉음을 내며 소멸했다.
에테르는 빛의 파동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파생된 부산물이다. 과거 물리학에서 에테르는 파동의 진행에 있어 필수적인 광파동 매질로 여겨졌으나 처음부터 에테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에테르가 막연한 희망에 불과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진실이다. 과학자들은 에테르를 통해 파동설의 타당성을 찾고자 했고 릴리의 추종자들의 삶의 탈출구를 찾고자 했을 뿐, 결국 모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실체 없는 해답을 진리 삼았던 것이다.
아브락사스 또한 허구의 신이다. 선이자 악, 빛이자 어둠, 신이자 악마인 그는 무어라 명확히 명명할 수조차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싱클레어 역시 어렴풋이 감각하기만 할 뿐 끝내 아브락사스가 시사하는 바를 명확히 알아내지 못한다. 그렇게 구원자가 사라진 세계에는 남겨진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만이 공명한다.
절망은 빨간 에테르, 희망은 파란 에테르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끝내 낙원은 없었다. 오키나와도, 에테르도 하물며 릴리 슈슈도 날 것의 열네 살의 구도자가 되어주진 못했다. 비명과 분노, 허무의 한복판에서 유이치는 다시금 눈을 뜬다. 유이치는 릴리의 공연장에서 자신을 살게 했던 파란 고양이가 현실에서 자신의 영혼을 난도질한 호시노임을 알게 된다. 끝내 유이치는 릴리의 공연을 보지 못한다. 이는 그저 호시노가 그의 티켓을 구겨 던져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선악과를 베어 문 아담과 하와가 다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듯이 그가 현실과 에테르의 두 세계를 걸친 진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은 기약 없는 절망에 종착하지 않는다. 호시노를 관통한 유이치의 칼날은 이내 그의 선혈을 뒤집어쓴 채 파란 고양이를 상징하는 푸른 사과로 향한다. 유이치의 데미안, 유이치의 아브락사스의 세계가 막을 내린 뒤, 그의 손에 들린 건 무의미해진 여린 선악과 하나뿐이다. 그가 군데군데 붉게 물든 사과를 손에 쥐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빨간 절망과 푸른 희망이 교차하자 유이치의 분열한 두 세계는 치열하게 뒤섞인다. 정도를 모르고 쏟아지는 환한 빛 가운데 홀로 선 과도기의 소년은 위태롭다.
그는 여전히 날고 싶다. 또 다른 아브락사스를, 또 다른 에테르를 격하게 갈망한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맞닿아 있길 원하고 그를 지탱해 줄 무언가가 간절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결코 현실 아니면 낙원, 희망 아니면 절망이라는 식의 흑백논리로 작동하지 않음을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작품은 말미에 이르러 잔혹한 현실로부터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끝내 낙원은 없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혼탁한 화면 너머로 두 생존자의 모습을 비춘다. 내내 그들에게 비극의 주무대였던 학교를 배경으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가 흐른다. 쿠노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선율을 유이치는 잠잠히 두 눈으로 어루만질 뿐이다. 남겨진 둘은 현실의 단절도 에테르의 연대도 아닌 전혀 다른 신세계를 꿈꾼다. 그곳은 아브락사스가 없는 세계. 한없이 외롭고 한없이 슬픈 영혼들이 집결한 진정한 자유의 세계.
이와이 슌지 감독은 초기 디지털카메라 및 핸디캠을 적극 활용해 의도적으로 불안정하고 뒤틀린 구도를 택했다. 더불어 고채도의 자연과 대비되는 실내의 혼탁함은 작품의 암울함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반면, 고조된 노출값은 감독 특유의 흐릿한 영상미를 더해 각 씬에 눅눅하게 스며든 씁쓸함을 음미하게 하고 더디게 흐르는 듯한 영상의 템포에 관객의 오감을 서서히 녹여 기어이 작품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만다.
철저하게 계산된 그의 연출 방식은 결국 에테르를 가장 처음 음악으로 승화한 드뷔시를 만나 소실점으로 향해 간다. 괴작이라 평가할 만큼 기이한 시놉시스와 상반되는 필름의 수려함, 존재하지 않는 에테르라는 개념마저 작품의 기저에 희미하게 내비치는 치밀한 설계는 의미 없는 무늬를 뒤집고 반복해 완성되는 아라베스크와 같은 선상에서 '양면성과 순환'의 주제 의식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추락과 비상의 연속인 인간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전복되고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비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한 인간만이 작품 내내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복잡하고 아름다우며 그로테스크한 아라베스크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