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2025) / 네오소라
무언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태평양을 기준으로 뉴질랜드, 통가를 지나 일본 해구에 이르는 거대한 판의 경계, 일명 '불의 고리'. 그중 네 개의 판이 중첩한 일본 안팎의 충돌과 분열은 어쩌면 국가 탄생 이전부터 예견된 열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과격한 틸팅 기법이 가미된 오프닝 시퀀스 역시 가히 파괴적이다. 수직 하강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맞춰 지상의 모든 것이 일제히 무너져 내린다. 기어이 모든 것이 전멸하고 만다. 틀림없는 '지진'이다.
일반적으로 지진은 판의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낱 인간의 연약한 두 발이 내려앉은 지면 아래가 실은 거대한 지구 내부자들의 은밀한 접전지였던 셈이다.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부딪히고 밀려나며 팽팽한 텐션을 만들어낸다. 그 긴장감이 임계치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진원을 중심으로 지면이 미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코 이 미세한 진동을 간과해선 안 된다. 미동이 발생했다는 건 이미 지각의 어딘가 가장 취약한 부분에 작은 틈이 생겼다는 것. 지금이라도 진원을 찾아내야만 한다. 세계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다.
때마침, 프레임 너머로 테크노 비트가 난입한다. 카메라는 추락을 멈추고 두 소년이 몰래 잠입한 지하 클럽의 뒷문 틈만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맹렬한 진동이 청각을 압도하는 가운데 두 소년은 뜨겁게 전율한다. 정도를 모르고 고조되는 테크노 비트에 폐허가 된 지상의 절규가 잠식된다. 마침내, 진원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처럼 상·하층이 대립하는 수직 구조는 주로 계급과 저항을 다룬 작품에서 흔히 사용되며 오늘날까지도 평단의 찬사가 이어지는 봉준호 감독의 수작, 영화 ‘기생충(2019)’에서도 동일한 포맷을 엿볼 수 있다.
기생충은 도시의 상층부를 기득권의 전유물로 묘사한다. 이는 과거 상류층이 우천 범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지대에 밀집해 살았던 시대상을 가감 없이 적용한 결과다. 반면, 빈민가는 아득한 내리막길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꼭대기의 요새와 견주었을 때 반지하의 터전은 여러모로 취약하고 빈약하나 적어도 이들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갈 ‘둥지’가 있는 최소수혜자로 묘사된다.
육체의 빈곤은 허기를, 영혼의 빈곤은 초라함을 빚기 마련이다. 전 생애를 굶주린 공복기로 보낸 최하층의 미션은 숙주를 잠식하는 것도, 기생을 멈추는 것도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침투하는 가난의 범람을 버텨내야 한다. 비록 그 길이 사회의 투명 인간으로 전락하는 지름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봉준호가 상부와 하부 그리고 밑바닥의 탄탄한 3단 수직 구조를 구축해 빈부격차의 병폐를 직접적으로 꼬집는 반면, 네오 소라의 수직 구조는 지진 앞에 무용한 내진 설계만큼이나 유약하다. '학교는 작은 사회'라는 말이 있다. 수렴하는 자와 발산하는 자가 공존하는 한, 사회는 반드시 미동한다. 이윽고 작품의 가장 미약한 부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세계가 흔들리던 날, 우리의 우정이 기울어졌다.
지하 클럽에 들이닥친 경찰의 눈을 피해 학교로 도망친 음악 연구 동아리 부원들은 우연히 공무원에게 로비하는 교장의 부조리함을 목격한다. 좀처럼 함구하는 법을 모르는 두 소년은 교장의 노란 차를 지면에 수직으로 내리꽂아 공권력의 추락, 권력자의 타락을 적나라하게 조롱한다. 권위에 대한 복종이 불문율이던 올드 스쿨의 판도가 완전히 전도된다.
심증뿐이던 수뇌부의 주동자 색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으나 싸늘한 추궁과 뜨거운 저항이 대치하는 가운데 유타는 웃었고 코우는 굳었다. 일말의 환대도 기대하기 어려운 기득권의 폭력적인 언어는 설익은 미성년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찢고 선대로부터 세습된 그의 정체성마저 훼손했다. 가난한 자이니치 출신인 코우는 명백한 을의 일원이었기에. 멸시와 혐오의 난장 너머로 지극히 정당한 분노가 들끓는다.
반면, 유타는 전형적인 일본 사회의 청년 세대로 묘사된다. 유복한 순수 혈통 가문 출신인 그는 극우 사회가 주장하는 정상성의 표본이다. 혹자는 일평생을 갑의 일원으로 살아온 그가 수뇌부의 겁박에 시종일관 웃음으로 대응했음을 문제 삼는다. 적대와 차별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묵인하기 급급한 기득권 세력의 나이브함에 넌더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속단이다. 유쾌해 보이는 세계의 이면은 지독하리만치 처량하다. 여려야 마땅한 소년의 속내는 나날이 축적되는 회의와 공허에 일찌감치 마모되어 둔해진 지 오래다. 유타에게 있어 시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고급 아파트는 적막한 지옥이고 지하 클럽은 소란한 천국이다. 이토록 무의미한 수직 구조 앞에서 그는 불평등에 대한 동조가 아닌 조소의 웃음을 내비치며 가차 없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잘라낸다. 성년을 목전에 두고 맞물린 두 우정이 요란하게 갈라진다. 다시금, 세계에 지진이 인다.
규율이란 집단 다수의 유용한 규모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다수를 참으로 유용하게 만들어 놓기 위한 것으로서 다수를 지배해야 하는 권력의 장애요소들을 감소시키는 세밀한 기술적 창조의 집합인 것이다.
권력은 사회의 절망을 좀먹고 자라난다. 그러니 이번 재난은 굶주린 맹수 앞에 최적의 먹잇감을 던져준 격이다. 그들은 빈틈을 파고들어 제 발로 찾아온 군림의 기회를 재빨리 낚아챈다. 거대 텔레스크린 '파놉티'는 화면을 응시하는 수십의 시선 위로 태연하게 죄수 번호를 붙인다. 이것이 보호의 탈을 쓴 감시가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디스토피아의 서막이다.
작품 속 파놉티의 개념은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의 감옥 '파놉티콘'에서 출발했다. 벤담은 감시자의 부재에도 멈추지 않고 가동되는 무한 감시 매커니즘을 꿈꿨다. 수감자 개인이 하나의 작은 파놉티콘으로 전락하도록 불확실성의 세팅 값에 미세한 변주를 가하면서. 자기 감시의 끝은 권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다. 종국에는 체제의 입맛에 맞게 설계된 미상의 감시자에게 통제권을 일임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파놉티콘의 본질인 셈이다.
프랑스 출신의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규율 권력에 의해 작동하는 파놉티콘의 원리를 고스란히 사회 지배 구조에 투영한다.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1975)’은 파놉티콘 출범을 기점으로 권력의 흐름과 사회 감시 양상이 격변했다고 역설한다. 과거, 정부 권력은 사회 전반에서 뚜렷한 두각을 드러났다. 고문과 폭력이 난무하는 공포 통치, 그야말로 아수라가 따로 없었다. 정권은 즉각적인 복종을 담보로 구속과 통제를 공공연히 일삼았지만, 절대 권력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근대 정권은 일전의 좌초를 토대로 '권력의 비가시화'라는 전례 없는 새 지배 전략을 수립한다. 이 과정에서 '규범'의 개념이 개입된다. 규범은 곧 사회의 표준과 비표준을 가르는 스탠다드다. 이를 착실히 따르는 자는 곧장 정상 범주에 진입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자는 낙오된다. 정권은 선도의 명목하에 구성원 모두가 규범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두들겨 맞는 것이 두렵던 이들은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일제히 표준에 인접한 곳으로 몸을 날리려 안간힘을 썼다. 이제 개인의 신체와 사고는 모조리 국가에 헌납되고 말았다. 저 멀리서 '부드러운 지배'의 격앙된 함성이 메아리친다.
규범은 도덕과 통념의 탈을 쓰고 체제 속에 뒤섞였다. 작정하고 면밀하게 관찰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지배 전략의 일종이라고 의심할 리 없을 터였다. 그러나 푸코는 규범의 탄생에 얽힌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거의 완벽했던 사회에 거리낌 없이 균열을 내기로 결단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지식은 기득권으로부터 나온다. 일방향의 지식은 직선으로 둔갑해 표준과 비표준을 분리한다. 그렇게 기득권의 상식이 반영된 권력 구조의 산물 즉, 규범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푸코는 재차 질문한다. 표준과 비표준의 잣대를 만든 자는 누구인가. 비정상의 낙인으로 인한 좌절과 패배를 끝없이 양산하도록 만든 자는 누구인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푸코는 절규한다.
동시에 극우화 반대 시위의 화력은 들불처럼 번져간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무심코 내다본 거리는 어느새 서투른 손 글씨를 눌러 적은 저항의 언어로 가득하다. 이제 코우와 후미는 모든 저항의 최전선에 섰다. 다수가 규범에 복종하고 언론마저 침묵한다고 해서 사회가 임의로 규정한 비표준을 벼랑으로 내모는 극우 정권도, 권력의 천리안으로써 앞잡이 역할을 하는 거대 텔레스크린 파놉티도 마냥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 자리가 없어진 건 유타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을 앞둔 친구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떠났고 동아리실은 지진 피해가 우려된다며 폐쇄 처분이 내려졌다. 창고에 적재된 장비를 훔쳐 도망치는 유타의 만행은 최후의 발악에 가깝다. 힘겹게 도착한 주인 없는 지하 클럽은 방공호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번번이 지진이 발목을 잡았다. 내진 설계가 안 된 건물의 재개발 공문 앞에 소년의 간소한 희망이, 유토피아가 산산이 부서진다. 열도의 사회, 교육, 관계가 일제히 뒤틀린다. 우정이 무너지고 이념이 포효하고 권력이 난동한다. 여지껏 지반을 흔든 수차례의 여진과는 차원이 다른 거센 강진의 역습이다.
넌 음악이 전부인 것 같지?
그래! 나도 묻자. 길에서 소리 지른다고 세상이 변해?
지난 2011년, 예고 없이 열도를 덮친 재난은 대피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규칙과 매뉴얼에 순응한 자는 목숨을 잃었고 불응한 자가 생존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졌다. 와해된 사회는 배반과 이기주의가 마치 생존의 해답인 양 선동하고 따르도록 종용하며 의식 구조를 왜곡했다. 집단의 가치가 경시된 틈을 타 개인주의가 침습한다. 여러 갈래로 분화한 사회는 위태롭다. 각자의 여지(餘地)를 딛고 선 군집은 외딴섬의 집합체인 열도의 윤곽과 닮았다. 사익과 이데올로기가 차별과 갈등이 범람하는 가운데 완벽한 고립 상태가 완성된다. 견고한 각자도생 사회의 간극으로 사무치는 외로움이 흐른다.
그러나 이내 분쟁과 공격을 부추기는 사회의 명령은 공중에서 흩어진다. 엉겨 붙은 몸 사이로 보란 듯이 뜨거운 연대가 흐르고 고립의 잔여물이 씻겨나간다. 일순간 요란한 지진이 멎는다. 이념의 좌우, 계급의 상하가 의미를 잃고 모조리 붕괴된 자리에는 단단한 우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열도의 신인류는 우정을 뚫고 자라난다. 유타는 만행을 자백함으로써 파놉티를 몰아냈고 톰은 해외로 발길을 돌렸다. 아타와 밍이 연인으로 발전한 사이, 코우는 대학 장학금을 받게 됐다. 미미하지만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명백히 이로운 편으로.
작품 말미에서 유타와 코우는 육교의 갈림길 앞에서 작별을 직감한다. 격한 애정 표현과 실없는 장난의 부재에도 스크린 안팎으로 신뢰와 안정이 묻어난다. 작품은 그저 묵묵히 두 소년의 헤어짐을 관망할 뿐, 결말의 희비를 단정 짓지 않는다. 암전된 시네마에 등이 켜지고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작품은 엔딩의 방향키를 관객에게 위임하고 형체를 감춘다. 근미래 일본 사회에 속한 두 소년의 연대와 공생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책무인 셈이다. 첨예한 갈등과 힐난이 잔존하는 현세는 불화의 격전지와 다름없다. 작품은 이념의 고지전에서 방공호를 마련하고 화해의 공론장 역할을 자처한다. 지진과 균열의 말소를 호언장담하거나 승패를 심판하지 않고 오로지 미완의 우정이 연대하고 환대하며 끝내 작별하는 타임라인을 호젓하게 그려냄으로써 말이다.
영화는 흑과 백 그리고 적의 색채를 활용해 비교적 단조롭지만, 드문드문 강렬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높은 데시벨의 테크노 음악 역시 작품의 인상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청춘의 박동이자 감시와 억압이 번복되는 사회의 격동을 표현한 테크노 음악은 시네마 노스탤지어의 감각으로 직결된다.
네오 소라 감독의 시선에서 소년의 세계는 획일화된 성년의 세계와 달리 무수히 발산한다. 달리 말해 소년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재한 존재다. 고로 지진은 결코 인간을 낙담시킬 수 없다. 붕괴는 곧 변화를 불러온다. 이는 필연에 가깝다. 열도의 지리가 변할 것이고 소년의 모습이 변할 것이다. 관객은 변화의 중심에 곧게 서서 상황을 주시하고 또한 주도한다. 위선과 다툼이 즐비한 '디스토피아'를 가로질러 해피엔드가 머무는 '유토피아'로 전진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