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가 될 것인가, '대체'되고 말 것인가

서브스턴스(2024) / 코랄리 파르자

by 조희수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서브스턴스는 철저히 욕망의 외피로 전락한 한 껍데기에 관한 이야기다. 수백수천 젊은이의 무궁한 잠재력과 진실된 절박함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서 그녀의 이름은 명성과 인기가 보장된 스테디셀러였다. 아니, 보다 적확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렇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엔터 산업은 한 철 장사다. 대중의 까다로운 입맛에 부응하려면 무엇보다 신선한 원재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유통기한 지난 인력은 미디어의 도마 위에 오를 자격조차 없다. 대신 그들은 양지에 조금의 누도 끼치지 않을 변방에 고이 수납된다. 그것이 일선과 제작자의 상식이고 꿈의 공장이 지난 100년간 글로벌 엔터 산업에서 최상위 포식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법이다.


공장장의 상식은 한낱 상품에 불과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에 족했다. 그러나 대중의 먹잇감이 되기에 그녀는 과도하게 식상했다. 고지를 등반하는 샛별들의 힘찬 발걸음 소리가 겹쳐 들릴 때, 그녀는 낙상할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으리라. 이제 엘리자베스는 궁지에 몰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몸매가 더 이상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끝내 그녀를 비추던 유일한 스포트라이트마저 암전됐다. 캄캄한 은퇴의 끝에서 그녀를 기다린 건 안전한 착륙이 아닌 잔인한 추락이었다.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버젓이 살아있다는 감각은 그녀를 통곡하게 했다. 이토록 성하고 건재한 신체건만 대중의 거부는 단호하고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때 흐느끼는 그녀의 등 뒤로 낯선 무언가가 접촉한다. 장갑을 낀 손은 그녀의 척추 부근을 이리저리 촉진하고는 곧 청진기를 들어 정박에 맞춰 뛰는 그녀의 심장 박동을 묵묵히 청취한다. 엘리자베스의 내면은 분노와 회한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녀는 더 나은 나를 갈망할 자격이 있었다. 흠 없는 서브스턴스의 모체가 될 자격도 함께 말이다.


병원 문턱을 나선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동창 프레드를 조우한다. 관객은 이 과정의 발화를 통해 엘리자베스에게 '리지'라는 본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작품 내내 그녀를 리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프레드가 유일하다. 리지는 엘리자베스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인격체로서의 자아다. 다시 말해, 프레드만이 그녀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있는 셈이다. 서브스턴스의 유혹 앞에서 그녀를 상품이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이는 실로 천금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 짧은 찰나에 엘리자베스의 마음도 조금은 동했으리라 확신하나, 이마저도 폭발적인 욕망을 그르치기엔 역부족이었다.


라캉의 해석에 의하면 세계 즉, 사회는 한 개인을 주체로 부르거나 호명함으로써 일상 관계에 개인을 편입시킨다. 일평생을 엘리자베스로 살아온 그녀의 정체성은 은퇴 통보 이후에도 여전히 연예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리지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곳에 두고 온 박수갈채와 환호가 여전히 눈에 밟혔다. 엘리자베스는 하루빨리 그녀의 진짜 정체성이 살아 숨 쉬는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다.



과거의 영광으로 점철된 집은 족쇄와 다름없다. 그녀의 실직에도 방송가는 내내 분주했다. 공백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드는 젊은 쇼맨들의 지원서에 할리우드의 핫라인은 밤낮없이 가동되는 중이었다. 수십 년의 커리어보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갖는 경쟁력이 갑절은 우수하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되는 순간, 허망과 비탄이 피어오르고 그녀는 끝내 서브스턴스에 손을 대고 만다.


혹자는 이를 '어리석은 개인의 잘못된 선택' 정도로 가볍게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라캉은 욕망의 탄생 과정을 역순으로 되짚으며 앞선 비난 여론을 완벽히 뒤집을 최후의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그가 내민 역전패는 '주체성'에 근간을 둔다.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에서 통용되는 법과 규칙 즉, 사회의 문법은 전적으로 타자에 의해 구성된다. 결국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수용하는 또는 수용해야만 하는 그 순간, 자신의 장소와 역할에 복속돼 타자나 사회 질서에 의거한 것을 욕망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코랄리 파르자는 라캉의 장광설을 짧고 직관적인 숏으로 일축했다. 프레임 바깥에서 난입한 손이 강제로 약물을 주입하고 계란의 핵을 분화시키는 장면은 가히 폭력적이다. 이것은 통념을 따르라는 일종의 사회적 억압 혹은 종용으로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미(美)를 향한 엘리자베스의 광적 욕망은 타의에 의해 탄생한 참상의 일부인 셈이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아동 발달의 세 단계를 통해 앞선 표현을 뒷받침한다. 아이는 생후 6개월부터 18개월 사이에 거울 단계를 경험한다. 이는 자아에 대한 감각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아이가 자신과 세계의 차이를 확립하는 시기다. 이 시기의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의 신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완벽성과 통일성의 이미지에 환호한다. 이후 아이는 신체를 환경으로부터 분리해 인식하고 새롭게 획득된 경계 인식에 기반해 개별적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반면, 사회가 흘려보낸 오인, 소외 그리고 분열은 정체성을 갖춘 인간으로서의 환상을 상쇄하고 미성숙한 인간 존재를 직시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좌절한다. 어머니의 완벽성과 완전성의 수준은 자신이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존재 내 결핍을 회피하고 주체의 불안한 쾌감을 완강한 실재로부터 보존하고자 계획된 나르시시즘적 자아 이상화라는 것이 라캉의 설명이다.


아이는 어머니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자신의 미성취된 성숙함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머니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한다. 이에 줄리엣 미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다른 이의 욕망의 위치에서 자신에게로 스스로가 반사될 때만 자신을 개념화할 수 있다'고 말이다. 고로, 수는 타자의 욕망을 전적으로 수용한 엘리자베스의 나르시시즘이 내재된 분신인 것이다.



작품 내에서 '하비'는 기득권층 즉,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욕망은 노골적이며 저차원에 머문다. 배뇨와 음식 섭취 그리고 흡연이 이에 해당한다. 감독은 극의 초반부에서 새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장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로 담아 그가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표출보다 분출 혹은 폭발에 가까운 그의 욕망은 무분별하며 역겹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또한 코랄리 파르자의 원대한 계획 속에 설치된 복선일 뿐이다. 그의 혈류를 타고 흐르던 욕망은 고스란히 엘리자베스에게 이식되고 만다. 영원한 결핍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던 나의 구원자, 나의 분신은 이내 질투의 대상으로 돌변했다. 주체와 분신은 하나임을 잊지 말라던 서브스턴스의 경고가 무색하게 그녀의 시기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성이 마비되고 또 다른 나를 향한 분노만 남는다. 결국 그녀는 타오르는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고 폭식과 폭음을 자행한다.


욕구 충족과 비충족된 사랑의 요구 간 불일치는 욕망을 낳는다. 다시 말해, 욕망은 영원히 상실된 대상을 향한 이룰 수 없는 추구의 조건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욕망이 완전하다고 믿었다. 아니,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과 대중의 선호가 옳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척추를 찢는 고통을 감내하며 완전무결한 더 나은 나, 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담보로 한 외줄타기의 결말은 멸망이었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도, 돌아갈 자리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완벽히 난장이 되고 말았으니.



하지만 실패를 속단하기엔 다소 이른 감이 있다. '서비스 중단'이라는 최후의 패가 아직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그녀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서브스턴스에 전화를 걸었다. 이내 엘리자베스는 검은 약물이 든 주사기를 쥐고 곤히 잠든 수의 목덜미에 다가선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끔찍한 이야기의 방점이 찍히는 역사적인 순간, 전야제 전광판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고 만다. 질투와 분노가 사그라들자, 욕망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엘리자베스는 죽어가는 수를 세차게 흔들어 깨운다.


바닥에서 눈을 뜬 수는 찬찬히 상황을 파악하고 엘리자베스와 추격전을 벌인 끝에 그녀를 끔찍하게 살해한다. 분신은 자신의 존재를 완벽히 지우려 했던 주체의 육신을 보이지 않는 집의 골방에 가두곤 유유히 집을 나선다. 전야제를 하루 앞두고 모든 것이 각자의 결말을 맞이한 것 같은 그때, 수의 몸이 망가지며 비로소 감독의 폭주가 시작된다.


자아를 능가한 욕망은 결국 괴물로 변질됐다. 가면을 쓰기도 하고 맞지 않는 드레스를 구겨 입어보기도 하지만, 괴물의 외형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감춰질 수 없었다. 무대에 오른 괴물은 관객석을 향해 피를 분사한다. 이는 시네마틱한 연출 표현임과 동시에 욕망을 과다 주입한 사회가 맞이할 말로의 실상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피를 본' 셈이다.



세트장에서 도망쳐 나온 괴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흘러내린 뒤였다. 그 사이로 엘리자베스의 면피가 기어 나온다. 면피가 안간힘을 쓰고 안착한 곳은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새겨진 할리우드 한복판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최악의 모습으로 대중의 찬사와 환호의 환상을 마주한다. 이는 모든 고초를 겪고도 그녀의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어쩌면 그녀가 진정 필요로 했던 것은 단순히 '더 나은 나'의 모습이 아닌 '어떤 모습이라도 포용과 인정을 저버리지 않을 사회'였을 지도 모르겠다.


서브스턴스는 고어를 표방하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성(性) 상품화 문제를 가감 없이 다룬 다큐이자 할리우드 자본주의 구조를 고발하는 르포르타주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해당 작품을 감상하고 기괴함과 불쾌함이 밀려온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바디숏은 신체 품평을 의도할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편집 방식으로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 보여주는 연출을 택해 고어 영화 특유의 절단 표현을 더 했다.



평소 스너프 필름이나 슬래셔 무비 혹은 악명 높은 고어 영화가 익숙한 관객이라면 해당 작품이 호러 장르의 축에 설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디 호러는 현실 공포와 맞닿아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외모 강박 속에 갇혀 도태와 노화를 두려워하며 성형과 관리에 거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이들은 일명 '나비약'을 섭취하며 환각과 환청에 시달려야 하고 반복되는 섭식장애 사이클 앞에 무너진다. 여전히 노화를 방지해준다는 식품과 관리법 혹은 리프팅 시술이 성행하고 있고 연예인의 극단적인 다이어트 식단을 따라 하는 유해 콘텐츠가 공공연히 유통되는 사회에서 이는 결코 낯설거나 생소한 소재의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신선하고 도전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감히 식상한 수사들로 해석의 여지를 저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디 그라운드 영화계에서 이런 도발적인 필름이 나왔다는 사실에는 극찬을 보낸다. 코랄리 파르자의 영화는 전반적으로 폭풍 속에서 한없이 공명하는 세이렌의 선율과 닮아있다. 데미 무어와 마가렛 퀄리가 선보이는 고도의 연기와 명확한 색채의 대비가 자아내는 명랑한 필름 분위기는 기믹이다. 찰나의 유혹 앞에 평정을 상실하는 순간, 헬게이트가 열릴 것이라고 장담한다. 화려한 가면 뒤에는 뼈도 못 추릴 만큼 잔인하고 날카로운 사회의 단면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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