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3) / 조나단 글레이저
생은 필연적으로 인과관계의 연속이다. 따라서, 곧은 선형의 연대기를 주시하며 그저 전진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인간 존재는 과거의 원인에 대한 현재의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곧이곧대로 받으며 연명할 뿐이다. 글레이저 감독은 초반 3분간, 암전된 화면 너머로 기이한 사운드를 반복 재생함으로써 관객과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다. 사면초가에 놓인 관객은 압박과 사투하며 작품의 텍스쳐를 더듬고자 발버둥 친다. 그리고 마침내 관객을 '흥미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데 성공한 그는 화면을 응시하는 시선에 묶인 안대를 서서히 벗겨낸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옛말이 있다. 아우슈비츠에 기거하는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의 삶이 그러하다. 히틀러의 집권하에 권력을 거머쥐게 된 회스는 철저히 독일의 규율에 순복하며 살아간다. 이를 반증하듯 저택 내부는 흐트러짐 없이 정갈함과 동시에 한껏 경직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족함 하나 없는 대저택 위로 신의 축복과도 같은 햇살이 내린다. 앞선 모든 안정의 상징은 회스의 충성에 대한 대가다. 그러나 팔 척이 채 되지 않는 철조망 위로 난 광활한 허공을 침습하는 총성과 생존을 향한 수감자의 절박한 외침 앞에 관객은 찬사와 환호를 일제히 거둔다. 일순간, 그들은 이곳이 아우슈비츠임을 다시금 상기한다. 프레임 너머의 원망에 찬 눈동자가 회스의 뒤를 매섭게 쫓는다. 이윽고, 관객의 시선에 의해 회스의 에덴이자 방공호 그리고 가면이 철저히 붕괴되고 만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단 한 장면도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법이 없다. 그저 지옥의 중정을 천국이라 굳게 믿고 살아가는 나치 전범의 삶과 수감자의 울부짖음을 교차함으로써 참혹한 전경을 목도하게 할 뿐이다. 고로, '대치와 대비의 약호'는 작품의 핵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글레이저의 독특한 연출 방식이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흥미의 영역' 즉, 아우슈비츠는 두 계층이 극명히 대립하는 공간과 음향이 구분됨과 동시에 혼용되는 무척 모호한 배경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회스의 두 눈을 손수건으로 묶고 그를 계단으로 이끄는 장면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수감자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있다. 그러나 수백수천 유대인 수감자의 숨통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감출 수 없는 기대와 벅참에 내심 환호했으리라. 결국, 아우슈비츠 내에 두 천적이 공생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누군가는 내 이웃의 살인마를 보필해야 하는 한편, 그와 대척점에 선 누군가는 찢어질 듯한 비명도 한낱 소음 정도로 넘겨짚는 정경은 결코 공생이라는 단어로 일축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앞선 문장에 쓰인 공생을 '침범'으로 대체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치가 폭력과 학살로 유대인의 생을 침탈할 때,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담장 너머 왕국에 사는 이들의 삶을 좀먹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이들의 환호와 수감자들의 절규는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해졌다. 회스의 장모는 이들의 은폐된 침범을 즉시 감지한다. 철조망 타고 넘어오는 사체 태우는 냄새는 지독하게 매캐했고 침실 커튼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도살장의 빨간 불빛은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회스의 장모에게 있어서 기침이란 소극적인 구토 증세와 같다. 그녀가 저택에 입성한 이후 기침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아우슈비츠의 실상에 대한 목격 혹은 경미한 역함 정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회스의 딸이 몽유병을 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체보다 시체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죽음의 땅에서 편히 잠에 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학살터의 중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평화보다 전쟁을, 공생보다 살생을 먼저 학습했다. 영화의 말단부에서 회스의 어린 아들은 유대인 수감자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무감정하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만 내뱉을 뿐이다. 뒤틀린 역사의 잔재는 대물림된다. 폭력은 일찌감치 답습되고 있었다, 무심하고 냉담하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수감자를 단번에 학살할 수 있을지 고뇌하는 사무적인 태도와 달리 저택 중정에 핀 라일락 한 송이는 꺾지 못하도록 단호히 명령하는 그의 역설적인 태도에서 관객은 회스 내면에 내재된 깊은 불안을 엿볼 수 있다. 덤불로 벽을 덮어 두 계층의 삶을 철저히 분리하려던 그의 시도는 가상했으나 그것이 허공을 가득 메운 고함과 비탄까지 막을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우슈비츠는 모두의 고통과 죽음이 드리운 감옥인 셈이다. 앞서, 무력한 인간 존재는 과거의 원인에 대한 현재의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수용하며 살아간다고 언급한 바 있다. 변질된 아이들의 순수성과 학습된 폭력성은 회스 가문 즉, 범국가적인 범죄의 가담자이자 한 때 '갑'의 위치에 섰던 자들의 후예 역시 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 세대가 연좌제로 삯을 치러야 하는, 범국가적인 범죄란 그런 것이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대게 실제 역사를 반영한 작품, 개중 전범국의 잔인함을 소재로 한 타 작품과 견주었을 때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와이드 샷으로 전범 가정의 일상을 차분히 포착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글레이저는 핸드헬드나 POV 등 역동적인 카메라 구도를 취해 관객을 피해자의 편에 세우며 전범국을 향한 분노를 고조시키는 다소 고리타분한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해당 작품에 쓰인 숏은 무서우리만치 정적이다. 덕분에 관객을 고개를 돌릴 수도, 다른 자극에 휩쓸릴 틈도 없이 모든 장면을 소화해야 하며 처참한 심정을 묵묵히 쓸어 넘겨야 한다. 그 점이 작품의 가장 잔인한 면모이자 극악무도한 지점이라고 평가한다.
글레이저는 작품의 막바지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회스는 돌연 극심한 역함을 참지 못하고 연신 구토를 시도하는 장면을 통해 극의 세팅값을 무작위로 훼손한다. 그는 회스가 비인간적이고 평범한 얼굴로 무자비한 악행을 저질렀으며 고로 결코 후회나 자책 혹은 미안함 따위에 얽매여 살지 않을 인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레이저는 찰나의 주마등을 통해 회스를 잠시나마 프레임 너머 관객석에 앉힌다.
이윽고 아우슈비츠 추모 박물관의 전경이 보이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수백수천 수감자의 신발과 흰 벽에 줄지어 박제된 피해자의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이 스쳐 간다. 회스는 아직 살아보지 못한 결괏값을 선견하고 그제야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독일의 후대는 영원히 전범 과거의 빚을 청산하며 속죄 속에 살아야 할 것이고 이 참상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끝나지 못할 것이다.
글레이저 감독이 말미에 회스를 관객석에 앉히고 100분의 러닝타임을 견딘 관객의 무거운 심정에 동조하게 만든 것은 주체는 영화가 주체를 위해 만든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의 재생산이나 표현이 아니다. 공공연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중립적인 매체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신, 상상적인 현실을 구성하고 생산하는 과정이다. 고로, 나치의 비인간적인 행보와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 개념은 작품의 표면적 시놉시스를 구성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나치를 향한 지탄 그 이상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기존의 믿음'을 통해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 '홀로코스트'의 참혹성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미리 주어진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작품의 물질성과 유효성을 갖고 능동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혹자는 이 지점에서 가자지구를 향한 폭격과 민간인 학살, 국제법상 금지된 전쟁 항목의 위배 연상하고 손쉽게 이·팔전쟁을 떠올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또 연좌제를 지고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빚을 청산하는 삶을 떠올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차마 수용할 수 없는 속죄 앞에 주저앉아 절망하고 원망하며 또 다른 억겁의 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떠올렸던 대상이 무엇이든 관객의 그 모든 연상체는 휴머니즘의 부재로 귀결된다. 폭력과 갈등 그리고 허영이 점철된 사회, 개개인이 고뇌하지 않고 사상에 순복하도록 하는 사회. 우리가 지양하는 이것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생은 여전히 인과관계의 연속이다. 어쩌면 최악의 결과를 면할 원인에 근간하도록 방향성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또 다른 '흥미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