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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숨날숨 Feb 06. 2023

ㅎㅍ이야기

#3 초성으로 쓰는 이야기

ㅎㅍ이야기


뀨뀽휘핑크림: 아 씨발 그럼 현피 뜨든가!
후포리핵폭탄: 와. 그럼.

이별의 후폭풍은 거셌고, 한파경보도 호패 없이 들이닥친 날이었다. 고속버스를 두 시간 탔을 즈음, 형필은 술이 점점 깨고 있었다. 호프집에서 회포를 풀던 정신이 확 폈을 때는 네 시간이 되었을 때였고, 형필은 포효했다. 파형 없는 비명.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곳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소금기가 눅진한 한 마을, 울진 후포리였다.


버스에서 내린 그를 반기는 건 한 풍산개였다. “그래. 내가 개다.”

하마터면 죄 없는 풍산개에 횡포를 부릴 뻔했지만, 형필도 괜히 나이로 계란 한 판을 다 채운 게 아니었다.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대신, 뇌 없는 해파리같이 행동한 자신을 탓했다. 허파에 풍선만 가득했던 어제의 허풍과 삼십 년 전통의 허세를 탓했다. 한 편, 눈치도 없이 형필의 배고픔은 꽤나 헤펐고, 일단 밥을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해가 새파랗게 밝아오는 겨울 동해의 아침, 쫄래쫄래 가는 풍산개를 따라가 보니 합판으로 대강 만든 식당이 하나 나왔다. “이모. 여기 대게비빔국수 하나요.”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후포리대게국수를 하나 시켰다.
그러자 주방에 있는 팔순 넘었을 할머니 대신 히피펌을 한 젊은 여자가 나왔다. 정말 후딱 나온 국수에 밑반찬은 단 하나. 갖은 젓갈 - 방어, 갈치, 임연수, 쥐치 등 일곱 가지 생선이 들어간 김치. 형필은 울진대게가 들어간 국수에 김치를 말아 게눈 감추듯 먹었다. 흰색 반팔티에 빨간 양념이 온데 다 튀고 있었다. 개의치 않고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쫄깃한 면발과 채소를 와삭와삭 씹던 중 형필은 깨달았다.

에어팟에서 들려오는 힙합과 자신의 평행이론을. “힙합엔 폭행이 가득해 보이지만, 결국엔 평화로 귀결된다! 형필도 그렇다! 형필이 현피를 뜨지 않는 건 쫄려서가 아니라 후포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힙합 비둘기가 된 형필은 얼른 계산을 하고 집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현피는 무슨. 방금 옆 테이블에 검은 양복 한 패거리가 들어서서가 아니다. 절대 절대 아니다.

“어제 반피 같은 아 하나 손 좀 봐줄라카다가.”

한 팔에 잉어수염이 그려진 형님이 어젯밤에 피시방에 갔다는 얘기를 했다.

형필은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놨다. “여기 계산이요.”


“해피!!” 팔순 할머니의 부름이었다.

강아지를 부르는 듯했지만 마당의 풍산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호피무늬 몸빼바지를 입고 훌라후프를 돌리던 히피펌 여자가 들어왔다. 어쨌거나 형필은 롱패딩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없었다. 지갑이, 화폐가, 카드도.  

“만 원.”

해피는 또박또박 말했다. 형필은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데 힙합이 너무 오랫동안 길게 흘러나왔는지, 휴대폰은 꺼지고야 말았다. 평화로운 계좌이체의 빛도 꺼졌다.

“만 원.”

당연하게 두둑했던 롱패딩 호주머니에서는 애꿎은 핫팩만 나왔고, 나머지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지난밤 호프집에서의 행패가 머릿속에서 한가로이 지나갔다. 튀어나갔던 지갑이, 화폐가, 카드도.

“혹시 휴대폰 충전기 있어요?”

해피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다. 흘끗 보더니 안드로이드 충전기를 흔들었다. 합판으로 지어진 후포리 식당에는 아이폰 충전기가 없었다.


“돈 없어?”

길어지는 계산 장면에 하필 잉어 형님이 돌아봤다. 형님의 팔은 흉포한 근육으로 포화상태였다. 저 형님이 <후포리핵폭탄>이면 오늘이 형필의 제삿날이었다. 비웃음이 가득한 해피의 입꼬리가 더해졌다. 형필에겐 필히 기저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주인 할머니가 나섰다. “서울 총각. 돈이 없어?”

“저 서울 총각 아… 아닌데요. 제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지금 돈이 없는 거라서요. 아니 돈이 없는 게 아니라 휴대폰만 켜지면 돈이 있는데 휴대폰이 꺼져서...”

해피가 말을 거들었다. “먹튀?”

이미 패거리 형님들은 다 같이 돌아앉았고, 잉어 수염은 벌렁거리고 있었다.

“푸하하. 뭐 저리 반피 같은 아가 다 있노.”


반피라는 말은 현피와 맞닿았고, 형필은 정말 지릴 뻔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 탓일까. 축축해진 바짓단에 형필은 정신이 한 풀 꺾였다. 눈을 떠보니 풍산개가 연신 다리를 할짝할짝 핥고 있었다. 형필이 일어난 걸 알리듯 개가 짖었다. 주방에 있던 해피가 나와 손뼉을 세 번 치고서는 손을 까딱거렸다. “밥값.”


어느새 점심시간이었고, 검은 양복 무리는 이미 사라진 채였다. 대신 파도처럼 장화 신은 아저씨 무리가 들어왔다. 아침부터 차츰 쌓인 설거지거리는 서울 총각이 할 뿐이었다. 점심시간을 지나 이른 저녁 손님까지 받았을 때, 해피는 다시 손을 까딱까딱했다. 주인 할머니는 풍화된 주름 따라 이리저리 졸고 있었다.


해피가 휘파람을 불자, 풍산개도 따라나섰다. 해질녘 파도가 후포리 전체를 후비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조막난 집들의 외벽을 화폭 삼아 헤엄쳤고, 이내 하나의 파랑으로 합해졌다. 구불구불한 머리의 해피의 얼굴이 들어왔다. 상큼하다 못해 피도 마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난 필리핀에서 왔어.”

폐허가 되었던 가정사부터 국제결혼을 하러 후포리에 와서 파혼을 하기까지. 파란만장하지만 불가피했던 형편을 해피가 유창하게 이야기했다. 해피는 큰 눈으로 형필을 바라봤고, 형필도 자신이 후포리에 온 이유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어제 술마시고 게임을 하다가 누가 자꾸 내 아이템을 스틸하는 거야. 그래서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 여자친구도 뺏겼는데 아이템까지 뺏기니깐. 그러다가 눈 떠보니 후포리더라.”

해피는 키득키득 웃었고, 풍산개는 다시 바짓단을 할짝였다. 호피몸빼바지와 빨간 국물이 튄 티셔츠 사이로 약간의 훈풍이 찾아왔다. 인생은 얄궂게도, 험한 비포장도로를 넘어 버스 터미널이 보였다. 해피는 꼬깃꼬깃 접힌 돈을 펼쳐 버스표를 사주었다. 형필은 희지 않은 마음을 가득 담아 자신의 번호를 해피에게 알려주었다. “연락해. 돈은 꼭 돌려주어야 하니깐.”

서울에 도착한 형필의 휴대폰은 드디어 켜졌지만 해피에게서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잘 가. 뀨뀽휘핑크림.'  

- 후포리핵폭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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