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늘은 콩밥이네요.

무뎌지는 건 흘러가는 시간이 주는 선물 같은 거예요.

by Soomkyul

코 끝에 힘을 주고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다가 위아래로도 방향을 틀어주면 냄새가 더 잘 맡아져요. 나는 개코였는데 아, 여전히 개코인데 조금 늙은 개 코가 되었답니다.


주방에서 엄마가 요리할 때 가끔 흘리는 부스러기들이 있어요. 몰래 슬쩍 가서 훔쳐먹은 적이 많아요. 한 번에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거든요. 그만큼 날카롭게 자기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줬어요. 요즘에는 냄새들이 조금 뭉툭해서 간식이 땅에 떨어져도 찾기 힘들어요. 근데, 누나가 눈앞에 가져다주고 입에 쏙 넣어주니까 더 편해요. 그래서 가끔은 어디 있는지 아는데 그냥 모르는 척해요.


뭉툭해진 냄새로도 알 수 있는 건 많아요. 가령 누나가 퇴근하는 시간이 그래요. 쌀밥 냄새가 나거든요. 한참을 자다가 배가 고플 쯤에 흰쌀밥 냄새가 솔솔 나요. 앞집 아줌마도 나처럼 아저씨를 기다리는 냄새예요. 그리고 누나가 곧 온다는 냄새기도 해요. 그러면 현관문 앞에 가서 문 틈 사이로 코를 박고 앞집의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일지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음식냄새는 너무 먹음직스러워요! 고기반찬이 그중 제일인데, 나는 다 먹고 싶은데 왜 못 먹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 검은콩 밥은 싫어요. 어쨌든, 요즘에는 옆에 있으면 그래도 조금씩 나눠 준답니다.


보세요.


문 틈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음식 생각을 하다 보면요, 엘리베이터 띵동 소리가 들리고 “12층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요. 그럼 나는 너무 신나서 온몸에 기쁨의 울렁임 같은 게 퍼지는 거 같아요. 꼬리가 절로 흔들린다는 뜻이에요. 근데, 앞집 아저씨가 먼저 올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날은 누나가 조금 늦게 온다는 거예요. 보통 누나는 뭘 하러 가기 전에 나랑 산책을 꼭 하고 가거든요. 근데 아저씨가 먼저 온건 어쩔 수 없는 약속 같은 게 있나 봐요. 아마 누나는 알싸한 술 냄새를 풍기며 신이 나서 들어올게 뻔해요.


이런 날이면 그냥 내 자리로 가서 마저 잠을 자요. 그러다 눈을 뜨면 누나가 실실 웃으면서 내 얼굴 앞에 와있을 거예요. 요즘에는 내가 문 소리를 잘 못 들으니까요.






어느 날은 누나가 엉엉 울며 집에 들어왔어요. 실실 웃는 얼굴이 아니라 무슨 일인지 생각을 해봤는데요, 손에 낯익은 담요 하나를 쥐고 있는 게 왠지 알 거 같았어요. 그 남자가 집 앞에 왔었나 봐요. 담요에서 그 남자의 냄새랑 익숙한 자동차 냄새 같은 게 나요. 차에 두던 담요를 주러 왔었나 봐요. 누나는 연신 미안해서 어쩌냐고 울며 나를 끌어안아요. 왜 나를 끌어안아요? 나는 지금 배가 고프고, 상처는 그 남자가 받은 건데.


그 남자가 누나를 많이 좋아했어요. 나도 알아요. 매일 누나를 출퇴근시켜 주고, 내 오리스틱이며 삑삑이 쥐 장난감도 사다 줬거든요. 근데요, 사람들은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아요. 그 남자는 너무 어렸고, 누나는 이제 오래도록 같은 시간을 걸어줄 사람이 필요하대요. 웃기죠. 그렇게나 혼자서 잘 지내던 누나였는데. 내가 누나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누나도 누나가 필요한 걸까요? 그 남자를 보낸 날에도 누나는 울었어요. 근데 꼬박 2주가 지난 뒤에 또 엉엉 울다니. 그래도 걱정은 안 해요.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게 또 흥얼거리며 기쁨의 누나로 돌아오거든요. 우리 누나는 그래요. 어떤 슬픔도 하룻밤을 넘기지 않아요. 어렸을 땐 몇 날 며칠이 걸렸는데, 이제는 찰나예요.


나도 누나도 같이 14년을 지내면서 내 냄새들이 뭉툭해지듯이 누나도 슬픔들이 뭉툭해지는 법을 배웠나 봐요. 날카로운 것들은 쉽게 찌르고 아프지만 동시에 선명하거든요. 대신 뭉툭한 것들은 희미하고 아른거리지만 동시에 부드러워요. 아마, 내가 14살이 됐고 누나가 33살이 됐다는 뜻인가 봐요.









땅에서 나는 냄새가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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