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를 돌면 마음 놓고 뜀박질을 시작할 거예요
우리가 산책을 좋아하는 건 알죠?
왜 좋아하는지도 알려나. 동네 사람들과 아래층 강아지의 냄새가 일단 좋아요. 그날그날 다른 냄새들이 알려줘요. 아,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뀌었구나. 오늘은 그 검은색 강아지보다 내가 먼저 나온 거 같아요. 그러면 이겨버린 기분이에요. 근데, 무엇보다 나갔다가 다시 누나랑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시간을 위해서 산책을 좋아하는 거예요. 몰랐죠?
산책이 끝나갈 쯤에, 집에 가는 길이 있어요. 피자집 앞에서 코너를 돌면 아파트 샛길로 들어가는 길이거든요. 그때부터 다리에 힘이 팍 들어가고 나는 뛰게 돼요. 그렇게 누나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바짝 뛰면, 심장 가득 세상이 들어온 기분이에요.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잘 못 찾는데, 누나가 그럴 때마다 소리쳐요 "한번 더 가야지!" 하면 그다음 입구가 우리 집 입구예요. 달릴 때마다, 혼자 산책하는 할머니를 지나쳐요. 늘 허리가 꼬부라져 아파트 주차장을 왔다 갔다만 하는 할머니예요. 할머니는 뜀박질은 못하는데, 나는 아직 뛸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까지는 아니겠죠.
어느 해인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누나가 불현듯 걸어야겠다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어요. 엄마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죠. 엄마는 그 해 2월 오후 4시마다 누나의 전화를 기다리고 누나가 그날 하루 머무는 호텔의 이름과 방 번호를 적어뒀어요. 그러니까 2월 내내 "흔쾌히"를 후회했어요. 누나는 서울의 당산역에서 땅끝마을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요. 누나의 긴 산책이었어요.
그 산책 중에, 하루는 어디 산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내려온다고 난리가 났었어요. 누나 말로는 국립공원이 워낙 커서 거길 돌아가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대요. 결국, 어둑해질 때나 되어서야 그 산에서 내려왔어요. 어두운 산이 무서워서 뛰어 내려왔대요. 거기서 내려와서 먹은 수제비가 그렇게 맛있었다고 해서 나중에 아빠랑 먹으러 갔었는데, 반응이 별로였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는 금강산을 먼저 올랐어도 좋았을 거 같아요.
또 어느 날은 누나가 머문 오래된 여관의 사장 아저씨가 젊은 아가씨가 혼자 왔다고 그렇게 반기더래요. 아직 총각인 조카가 있는데, 근처에 뭐 유적지를 구경시켜 주겠다며 소개를 시켜주겠다나. 시골이라 그랬나 봐요. 근데, 그 총각인 조카는 누나보다 20살이나 많았는걸요. 그래서 그날 밤 누나는 엄마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여관방 번호를 꼭! 외워두라고 100번이나 말하고 겨우 잠에 들었어요.
누나가 그 겨울에 긴 산책을 떠난 건, 뭐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말했잖아요. 조금 특이하다고. 땅끝 마을에 도착하고는 아빠가 누나를 데리러 갔어요. 누나가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누나는 이틀을 내리 잤어요.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한참을 묵혀둔 것들을 풀어헤칠 곳이 있다는 뜻이기도 한가 봐요.
어쨌든 한동안 누나는 연신 "한 달을 걸려 내려간 길을 4시간 만에 차로 올라오니까 기분이 나쁘네."라는 말을 달고 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