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과 토슈즈

봄날의 여행

by 숨은결

모네 부인은 날이 너무 좋아서 딸아이와 함께 외출하기로 작정했다. 햇빛이 쨍쨍한 탓에 고이 모셔두었던 새 양산을 챙겼다. 모처럼만의 외출이라 아이도 신이 났는지 화사한 꽃무늬 옷을 스스로 꺼내 입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네 부인은 아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시내 구경을 좀 하고 아이와 맛있는 점심을 먹고, 공원에 앉아서 책을 좀 읽을 요량으로 스케줄을 구상했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비로소 따뜻한 봄이 왔다. 집안에 갇혀서 매일같이 집 앞마당에 낮게 드리운 그늘과 뿌연 구름을 본 탓에, 도통 기운이 나질 않았다. 겨울이 길고 길었다. 아이도 나가서 놀지 못해서인지 응석과 떼가 부쩍 늘었다. 하아,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인다. 살 것 같다.

모처럼 좋은 날씨에, 시내는 외출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 길 가장자리에 늘어선 소매상들의 물건도 오늘따라 싱싱해 보이고, 가게의 쇼윈도도 번쩍번쩍 빛이 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시장은 비로소 자기 소임을 할 준비에 신이 난 듯 밀려오는 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상인들은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흥이 나서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다. 시내로 오는 길에 다리를 건넜는데, 운하를 오가는 돛단배에도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즐거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게도 저렇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눈부셨던 날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 부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서로가 아닌 가정을 운영하는 것과 딸을 훌륭하게 키워내는 일이 전부였다. 잠시 딴생각에 몰두하느라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이가 엄마를 여러 번 부르면서 손을 당겼다. “엄마, 엄마!! 어서 가요, 제발요!” 모네 부인은 길을 재촉했다.

모네 부인은 먼저 식료품점에 들러서 그날 점심으로 먹을 빵과 버터는 평소보다 넉넉하게 구입했다. 빵집에 들어서자, 갓 구워낸 뜨끈뜨끈한 버터향 가득한 빵냄새로 입에 침이 고였다. 특히 이 빵집은 맛이 좋기로 유명해서 늦게 오면 한참 기다려야 했는데, 오늘은 운이 좋았다. 맛있는 커피 한 잔과 아이가 마실 우유만 사면 공원으로 향할 수 있다. 뱃속은 이미 맛있는 빵을 달라고 기분 좋은 외침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빵집을 나와서 시내를 걸어가다가 문득, 그림이 걸린 가게 앞에 자신도 모르게 가서 선 모네 부인. 그곳에는 우아한 발레리나의 모습이 그려진 액자가 쇼윈도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사방으로 쭉 뻗은 원형으로 펼쳐진 채 공중에 머물러 있었고, 그녀의 팔은 모든 것을 품어주려는 듯양옆으로 쭉 뻗어 있었고 그녀의 다리는 금방이라도 위로 폴짝 뛰어오를 듯 가벼워 보였다. 우아한 발레 동작을 한 발레리나의 표정은 알 듯 말 듯 묘했다. 행복한 걸까? 지금 발레에 흠뻑 취해서 몰아지경에 빠진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살피던 모네 부인은 발레리나의 눈을 쳐다보았고, 동시에 그녀는 발레가 상연되고 있는 발레 극장에 앉아 있는 자신을 느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분명 가게 앞에서 잠시 그림을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딸아이는 어디 있지?’ 다행히도 아이는 옆좌석에 앉아서 열심히 사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였다. “엄마, 저 언니 드레스에서 빛이 나요!” 흥분한 딸의 목소리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믿을 수 없게도 눈앞에서 발레 공연이 상연되고 있고 모네 부인은 극장 중앙 좌석에 앉아서 보고 있었다. 분명 가게 쇼윈도 앞에서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건만, 그 발레리나가 눈앞에 실재하고 있다니! 직접 본 발레리나는 그림과 달리 더욱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녀의 발레동작은 무엇하나 흐트러짐 없이 아주 부드럽게 물 흐르듯 이어지고 있었다. 모네 부인은, ‘어쩜 저렇게 잘할까? 게다가 너무 아름답잖아. 한때는 나도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는데, 꿈을 꿀 수가 없었지.’하고 생각하면서도 눈은 무대 위에 있는 발레리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가 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전혀 생판 모르는 그림 속의 여성이 또 다른 나처럼 보였다. 어쩌면 과거의 꿈을 이루지 못한 내 안의 염원이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모르는 여동생이 지구상 어딘가에 살고 있었을지도. 이런저런 생각의 고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네 부인 옆에서 다소 진지하게 발레를 보고 있던 딸아이는 엄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지만, 자신만큼이나 엄마도 발레 공연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해 버렸다. 발레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커서 발레리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이 어린 꼬마 숙녀에게도 꽤나 인상적인 시간이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발레리나의 몸이 공중으로 휙 들어 올려졌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발레 동작이 끝날 때까지 모두 숨을 참는 듯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실제로 극장 내에는 어떤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자, 일제히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모네 부인은 발레리나가 공중에서 회전하는 모습에 전율을 느끼며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어떤 말도 목구멍에서 내주지 않았다. 극장의 무대 조명이 눈부시게 발레리나를 향해 쏟아졌고, 그 환화게 눈부신 조명에 발레리나의 몸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듯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모네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상인과 손님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렇다, 모네 부인은 더 이상 극장에 앉은 손님이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발레리나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 속 인물에 불과했다. 엄마 손을 잡은 딸아이가 엄마 손을 잡아끌며 어서 가자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어서 공원으로 가자. 많이 배고프지? 하며 정신을 차리고 발길을 옮겼다. 그건 꿈이었을까?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림 속 발레리나가 힘차게 발레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느낀 모네 부인은, 긴 겨울이 지나고 맞이한 봄의 시작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이번 봄은 어느 때보다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림 속 발레리나의 눈빛이 아직도 잔상처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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