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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pr 16. 2021

사주팔자대로 살아보니......




어렸을 때 엄마는 용하다는 곳에서 가끔 점을 보고 오셨다. 기억에 남는 하나는 내가 배에 큰 흉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주 배가 아팠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점쟁이 말이 걸렸는지 병원에 다니던 둘째 언니를 시켜 꼬박꼬박 진찰을 받게 하셨다. 다행히 성인이 되도록 내 배는 무탈했으니 그 점쟁이가 엉터리 아닐까 했는데, 결혼을 하고 두 녀석을 제왕절개로 낳느라 어쨌든 내 배에는 큼지막한 흉이 생겼다.


두 번째는 웬만큼 나이들 때까지 사회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 나설 초저녁에 태어났으니 집 안에서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만 살면 안 되고 밖에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 등에 업혀서 살겠다고 작정한 적은 없지만, 아이들을 봐주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이리저리 알아보았으나 다른 방안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전담해야 할 것 같아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 Ramdlon, 출처 Pixabay




"너는 절대 직장을 놓으면 안 돼"
"..........?"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편안하게 살면 안 돼"
"..........?"


엄마는 어디서 그런 강력한 신념이 나오는지 내가 편히 놀겠다는 것도 아니고, 육아 때문에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어 그만두는 것인데도 극구 반대를 하셨다. 막내딸 사랑이 유별했던 엄마는 평소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믿고 묵묵히 지켜봐 주셨던 그동안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직장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처음으로 완강한 태도를 보이셨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회사에서 바로 뒤에 앉은 남자 선배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으면 자꾸 베란다에 다리 올릴 사람이니 나더러 그만두지 말라는 것이다. 나의 어떤 면이 그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넌지시 던지는 그 선배의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엄마의 결사반대에 부딪혀 다른 방도를 알아보기로 했다.

당시는 육아시설이 많지 않던 때라 궁리 끝에 어린이집이 있는 친정 동네로 이사를 했다. 두 돌이 채 안 된 큰 녀석을 어린이집에 떼어놓고 출근할 때마다, 아들의 울음소리는 내가 골목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등 뒤에서 배웅을 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녀석의 울음은 못이 되어 발바닥에 촘촘히 들어와 박혔다.




© pixel2013, 출처 Pixabay




일과 육아, 결혼의 등짐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출산장려책으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혜택도 없이 출산 휴가가 끝나면 마치 아이를 낳지 않은 것처럼, 아이 엄마가 아닌 것처럼 일을 했다. 여자라서, 아이 엄마라서.....라는 토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육아뿐 아니라 일에서도 고민은 매한가지였다. 업무의 성차별은 가을 운동회 청군, 백군처럼 선명하게 나뉘었고, 남자는 당연히 맡는 일을 여자는 투쟁을 해야 겨우 맡을 수 있는 불합리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계속해야 할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갈등했지만 까마득한 현실의 벽은 바로 코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돈 버는 일"을 선택하기로 했다. 직면한 현실과 타협해야 했고 타협한 현실을 내게 이해시켜야 했다. 여행이 일이 되면 더 이상 여행이 아니듯이 아무리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그 안에는 어쩔 수 없는 회의와 불만은 있기 마련이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의 가치를 따로 부여하기로 했다.

2년 반마다 인사이동이 있어 일의 분위기 전환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창의적인 일을 하거나, 혼자 분석해서 결과물을 찾아내는 일을 하는 동안 업무 스트레스는 있어도 일에 대한 의욕은 충천했고, 성과를 이루었을 때는 짜릿한 희열도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일이 많은 부서를 찾아다녔다. 편한 부서를 갈 수 있는데 왜 굳이 그런 힘든 데를 자원해서 가느냐며 주위에서는 의아해했지만, 그렇게 일 구덩이에 나를 밀어 넣고서야 버틸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에 대한 갈증과 허전함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취미로 메꾸었다. 때로는 달래고 어르고, 때로는 스스로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신바람 나게 나아가기도 근근이 버티기도 했다. 그러면서 35년을 보냈다. 점쟁이가 말한 그 웬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 bboellinger, 출처 Pixabay




사주팔자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에 강하게 작용하는지는 몰라도, 무조건 나를 믿고 따라주셨던 엄마의 일생일대 단 한 번의 반대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점쟁이의 말을 따라서가 아니라,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다소 터무니없는 것이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 드리고 싶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9년이 되어간다. 무엇을 걱정해서 그토록 나를 세차게 몰아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내게 더 없는 선물을 주고 가셨다. 평생 흔들리지 않는 친구 같은 일을 곁에 두게 하여 그 안에서 많이 단단해지고 치유받을 수 있었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도, 그날그날 쳐내야 하는 업무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소 염세적이었던 내 성격에 사회성을 덧입힐 수 있었고, 살면서 회사 선배가 했던 우려에 가끔 고개 끄덕여지던 순간도 일이 있어 지나칠 수 있었다. 지독한 사춘기를 앓았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던 수많은 생각도 일을 통해 희석할 수 있었으니, 일은 내게 돈벌이 그 이상의 의미였다.

덤으로 남편이나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적당한 금액의 연금도 챙겼으니, 부모 말을 들어서 자다가 떡이 생긴 건지 사주팔자대로 살아서인지 어느 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엄마 걱정 덜자고 따랐던 일에 오히려 내가 득 본 것이 더 많다.

그 일의 끄트머리에 서 있고 보니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 한 것 같은 후련함마저 든다. 이제는 사주팔자와 상관없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련다. 그래도 되는지 이번에는 엄마도 아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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