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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Jan 05. 2021

도마 소리





"다다다 다닥, 다다다다닥........."

마트 다녀오는 길에 낯익은 도마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나는지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길가의 작은 초록 대문 집이다. 열어둔 대문 옆으로 주방이 있는지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더 또렷이 들린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무엇을 하는지 도마질은 계속되었다. 잠시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도마 소리는 누군가 던진 돌멩이처럼 내 안을 파고 들어와 침잠해 있던 오랜 그리움을 헤집어 놓는다. 그 진동이 온몸으로 물이랑처럼 퍼져나간다.
                                                                                           



"다다다다닥, 다다다다닥........."

아침마다 도마 소리에 잠을 깼다. 그러고도 한동안 이불 안에서 뜸을 들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오늘 반찬은 뭘까? 재료마다 다른 도마 소리에 메뉴를 맞춰보지만, 무엇보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나무 도마 소리가 그냥 좋았다. 언제부턴가 그것이 알람이 되었다. 맞춰놓은 사발시계 알람은 못 들어도 도마 소리에는 때맞추어 잠을 깼다.









© Alexas_Fotos, 출처 Pixabay





결혼하기 전까지 밥만 내 손으로 떠먹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엄마가 다 챙겨주셨다. 항상 어린 막내딸로만 보였는지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엄마의 잰 손을 따라갈 수 없었다. 주말에 가져간 관복을 빨려고 보면 어느새 빨랫줄에 널려 있고, 다림질은 내가 해야지 싶어 찾으면 이미 깔끔하게 다려져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쌈을 유달리 좋아해서 식구들은 나를 "쌈순이"라 불렀다. 강된장에 연한 호박잎, 멸치 액젓과 다시마, 고등어조림과 상추, 아삭아삭한 배추 속 쌈, 데친 양배추나 얼갈이, 생깻잎, 데친 깻잎......  쓰드름한 머위잎만 빼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손바닥에 올려지는 것은 다 먹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밥상 옆에 앉아 한 장, 두 장 쌈을 올려주셨다. 내가 알아서 먹겠다고 해도 손바닥이 빌 틈을 주지 않고 후딱 쌈 한 장을 올려놓거나, 밥공기에 빙 둘러 빨래 널듯 걸쳐 놓으셨다. 그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밥이 넘어갈 때마다 내 목구멍에 치받히는 것이 무엇인지......





© lpegasu, 출처 Pixabay





다다다다닥 도마 소리 뒤로 언제나 맛깔스러운 반찬들이 상에 올랐다. 새콤달콤 오이무침, 오징어 무채, 간간한 나물 무침, 생선조림, 해물찜, 추어탕, 시원한 소고기 뭇국...... 나를 깨우던 도마 소리는 평안한 일상이었고, 설렘이었으며 그것은 그냥 엄마였다.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집에서 첫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에 깨었을 때, 아무리 기다려도 늘 듣던  도마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응? 오늘은 왜 도마 소리가 나지 않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아침마다 들리던 엄마의 도마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젠 내가 아침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상실의 혼란에서 빠져나오기까지 혼자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아들을 제왕절개로 낳을 때마다 나는 입맛을 잃었다. 한 달 가까이 제대로 먹지 못해 쭉쭉 살이 빠지고 있었다. 더욱이 둘째 때는 백 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더욱 심했다. 그런 딸이 안쓰러우셨는지 어느 여름날, 엄마는 우뭇가사리 묵을 간장 양념에 무쳐 주셨다. 입맛이 돌지 않아 도다리, 소고기, 조개..... 종류대로 끓여주는 미역국은 다 밀어내고 그 묵무침으로 배를 채웠다.

언젠가 그게 먹고 싶어 해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게 먹고 싶다고 해도 엄마가 없다.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어볼래도 그럴 수 없다. 천 년 만 년 계실 줄 알고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원할 때마다 배달음식처럼 뚝딱 눈앞에 차려질 줄 알았다.






© radragon, 출처 Unsplash





가끔 큰언니가 해준 칼칼한 얼갈이김치에서 엄마 맛이 난다. 가져오자마자 미친 듯이 밥 한 숟가락을 욱여넣었다. 갑자기 목구멍이 바늘구멍만 해져 자꾸 밥을 밀어낸다. 목구멍을 막고 있는 밥을 뱉어내고 허겁지겁 냉수 한 컵을 들이켰다. 두 눈에 시뻘건 김치 국물이 고인다.






"다다다다닥, 다다다다닥........."


도마 소리는 한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내려놓았던 장바구니를 다시 들었다. 집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옮길 때마다 그 소리는 차츰 잦아든다. 잠시 들렀던 엄마가 다시 돌아간다......


"다다다다닥, 다다다다닥........."

"다다다닥, 다다다다닥........."

"다다닥, 다다닥........."

"다닥, 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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