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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Jan 16. 2021


​무생채로 기억된다는 것


2021. 01. 16.



오랜만에 무생채를 만들었다. 무생채는 식구 모두가 좋아하는 반찬 중의 하나다. 무가 맛있는 늦가을부터 자주 만들어 먹곤 했다. 금방 무쳐서 먹으면 아삭하고 시원한 맛에 넉넉히 무쳐도 금방 동이 나곤 했다. 


그러다 학업과 직장으로 식구가 빠져나가고 큰아들하고만 있다 보니 예전처럼 반찬 만들 일이 별로 없다. 아들도 나도 퇴근 후에 헬스와 수영을 하느라 닭가슴살과 고구마로 저녁을 때우고, 아침에는 과일 한쪽으로 해결하다 보니 평일에는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없고 주말에도 간단히 해결하곤 했다. 


퇴근길에 장을 봐서 아침저녁으로 새로운 국과 반찬 몇 가지씩 만들어 먹던 오래전에 비하면 무슨 이런 호시절이 다 있나 싶을 만큼 편하기는 한데 왠지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코로나로 운동을 못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반찬을 만들게 되었다. 



"어머니, 오랜만에 무생채 하셨네요!"


주면 주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하는 아들이 숟가락을 들면서 모처럼 한 마디 한다. 하도 무덤덤한 녀석이라 이 정도의 표현은 천지가 개벽한 것에 비길 일이다. 가끔은 서운한 생각이 들 정도로 무심한 녀석이라 과연 내가 죽고 나면 내 생각을 하기는 할까 싶어 언젠가 한 번 물어보았다. 


"너는 엄마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아주 쿨하게 어머니 안녕히 가십쇼~~~ 할 거지??"
"아우! 아니죠, 슬프죠"
"가끔 엄마 생각을 하기는 할 거야?"

"당연히 생각나죠"

"뭐가 제일 생각날 것 같아?"
"어머니가 해주시던 무생채요"

아들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툭 내뱉는다.



© skalekar1992, 출처 Pixabay




'에계~~~, 겨우 무생채?'


뭔가 분위기 있고 근사한 답을 기대했던 걸까? 무생채라는 말에 단단히 받치고 있던 긴장이 단번에 훅 털리는 기분이다. 


"어, 그래?"
라고 생기 잃은 대꾸를 했는데 아마도 녀석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며칠 지나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엄마는 무엇으로 기억되는지. 그것은 갓 담은 칼칼한 청방 김치, 기름 바른 금방 구운 김, 구수한 우거짓국, 시원한 동치미...... 엄마가 차려주신 소박한 밥상이다. 그러고 보니 특별히 화려하거나 대단하게 멋진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다. 떠올릴 거리가 많은 엄마를 둔 나에 비해 아들 녀석은 달랑 무생채 하나뿐이니 제대로 해준 게 없는 것 같아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나도 언젠가 엄마처럼 한 세상 살다 돌아갈 적에 작은 돌덩이 하나조차 남기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따금 무생채로 나를 떠올려 줄 사람 하나 쟁여 두었으니 아주 밑진 삶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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