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잊고 있는 것......

by 파란 해밀


집안 정리에 나섰다. 책과 그림을 비롯해 묵은 살림과 장에 묵혀둔 옷가지들을 처분하기로 했다. 그중에 거실 오디오도 포함시켰다. 오랫동안 아침을 깨워준 알람이 되어준 오디오다. 아침 준비를 하는 동안 즐겨 듣는 FM 채널은 매일매일 다른 맛의 노래로 음식을 만드는 나의 손과 마음을 들뜨게 했고, 이따금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에는 커피 한 잔과 더불어 함께 했던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것이 언제부턴가 일찌감치 일어난 남편이 거실에 나와 TV 주식 방송을 틀기 시작하더니, 골프에 빠지고부터는 새벽부터 일어나 골프 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웬 TV냐고 했지만 꿈적도 않는 그를 보며 더 이상 오디오를 켜지 않았다. TV 소리와 음악이 뒤섞여 오히려 어수선하기만 해서 아침 음악은 포기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는 사이 오디오는 그저 사소한 물건을 올려놓는 키 높은 테이블로 전락하고 말았다.



photo-1618667946843-011e40bde10a.jpg © leowieling, 출처 Unsplash



수년 동안 그저 자리만 차지한 채 테이블로만 사용하는 오디오를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다. 폐기업체를 불러 처리할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고거래 장터에 5만 원에 내놓았다. 구입한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값이지만 누군가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서 제 기능을 하는 것이 오디오도 좋고, 나도 폐기비용을 아낄 수 있으니 좋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사진을 찍어 사이트에 올리기 무섭게 연락이 왔다. 당장 오겠다는 것이다. 음악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오디오 틈새에 앉은 먼지를 닦고, 가져가기 편하게 거실 가운데로 자리를 조금 옮겨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초인종이 울렸다. 전화 목소리와 달리 음악적 감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굳은 인상의 중년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아주 익숙한 솜씨로 오디오 여기저기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마니아의 손길이라기보다 왠지 업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적 동네를 누비며 '개 팔아라"를 외치고 다니던 개장수가 개를 보던 눈빛, 싸늘한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처한 상황이나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없이 매뉴얼 같은 질문을 하던 수술실 간호사의 건조한 말투에서 느꼈던 이질감과 거리감 같은 것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두어 걸음 떨어져 그가 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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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치 그것을 만든 사람 이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오디오를 훑어갔다. 작동이 잘 되는지 틀어보겠다며 전원을 켜고 맨 아랫칸 선반에 있던 CD 한 장을 꺼내 밀어 넣었다.

"...................."
"...................."

음악소리가 거실 안에서 조용히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는 거실 바닥을 퉁기며 가볍게 튀어 올라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옆에서 가만히 서있던 내 심장을 마구 흔들어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전율인가?

'저 오디오 소리가 저렇게 좋았나?'
'너무 좋다. 저렇게 좋은 걸 왜 그동안 안 들었지?'
'지금이라도 안 팔겠다고 얘기할까?'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갔지만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나는 아무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 반면, 그 남자는 신속 정확한(?) 점검을 마친 후 누런 지폐 한 장을 건네고는 개를 끌고 가는 개장수처럼 오디오를 들고 돌아갔다. 혼자서 한 번에 옮길 수 없다며 아들의 도움을 아주 당당하게 요청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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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간 후, 손에 쥐고 있던 5만 원짜리 지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차마 지갑에 넣지 못하고 테이블에 놓았다. 오디오가 비워진 덩그런 빈자리와 그가 지나간 자리에 걸레질을 했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싸게 수거한 오디오나 전자제품을 손을 봐서 더 좋은 가격에 되파는 업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는 어쨌든 오디오를 처분하려 했고 처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디오가 있던 빈자리에 퍼질러 앉아 오래오래 걸레질을 했던 것은 떠나보낸 오디오의 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 미안해서였다. 매일 같이 들을 때는 그것이 당연하고 익숙해서 몰랐고, 오랫동안 내팽개치고 있다가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된 내가 미안했다.

늘 옆에 있어서 미처 그 가치와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이 내게 오디오만 그럴까? 물건조차도 이렇게 나를 전율하게 하는데, 어쩌면 우리가 사는 동안 설레지 않는 것은 오래되고, 익숙해서라기보다 헐값에 팔려간 오디오처럼 설레는 전원을 끄고 있어서는 아닌지 내게 되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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