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입히며 늙어간다

by 파란 해밀


하얀 욕실 벽 여기저기 작은 얼룩이 눈에 띄었다. 수세미로 문질렀더니 다행히 지워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염색약이 튄 것 같다. 새치 때문에 염색을 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서 나밖에 없는데 누가 염색을 했지? 하는 생각을 하며 혹시나 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염색했어?"
"네"
"왜?"
"새치가 있어서요"

군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아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예전에 없던 흰머리를 정수리에 파뿌리처럼 달고 어느 날 휴가를 나왔다. 녀석의 고충이 한 올, 두 올 꼿꼿한 억새처럼 내 심장에 들어와 박혔다. 녀석이 행정병 추천을 받고 잠시 갈등을 할 때, 그것도 나름 좋은 경험이지 않을까라고 말했던 나의 책임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온종일 군화를 신고 일해야 했던 환경은 기어코 자랑스러운(?) 무좀을 키우게 했고 덕분에 나는 뻔질나게 무좀약을 사서 보내야 했지만, 그런 일은 차치하고라도 함께 근무하는 원사의 10분 앞을 예측할 수 없이 돌변하는 성격에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힘들어하더니 함께 근무하는 행정병들과 함께 스스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체념과 포기가 큰 몫을 한 것 같았다.

몇 년이 지나, 우연한 기회에 군대 얘기 끝에 그 끔찍했던(?) 행정병 근무가 그래도 자신을 담금질하게 해 준 의미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하는 녀석의 어깨가 어느새 많이 단단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정수리에 꽂힌 새치는 그때를 잊지 말라는 증표인지 언제나 하얗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 peek_a_boo_who, 출처 Unsplash


스물한 살 꽃 같은 청춘에 듬성듬성 파뿌리를 달고 왔을 때는 참으로 어이없더니, 10년이 더 지나는 사이 그 개수도 많이 늘어나 있다. 머리 꼭대기에 돋은 거라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으려니 했는데 녀석도 그것이 거슬렸었나 보다. 내가 모르는 염색약이 욕실 선반장에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새치가 많지 않은데 염색하기는 아깝다"
"......."
"엄마 염색할 때 그 부분만 해줄까?
"괜찮아요"
"머릿결이 많이 상할 텐데......"

염색을 할수록 점점 더 푸석해지는 내 머릿결을 볼 때마다 젊은 날 "어쩜 너는 머릿결이 이렇게 좋아?"
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었는데...... 그런 시절이 정말 내게 있기는 있었나 할 만큼 가물가물하다. 길을 가다 앞서가는 누군가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보면 정신없이 그 사람 뒤통수만 보며 걸었던 내 심정을 아직은 머릿결이 반반한 아들은 당연히 알지 못할 것이나, 빼쭉 고개를 쳐든 새치를 가리고 싶은 녀석의 마음도 충분히 헤아려진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은 녀석 뒤로 지나는데 문득 정수리가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올라온 하얀 새치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녀석도 이렇게 눈에 거슬렸겠지...... 작은 가위를 들고 와 녀석의 정수리를 파헤쳤다. 겉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들추어 보니 그 안으로 새치가 제법 들어차 있다.

"가만있어 봐. 엄마가 잘라줄게."
"......"
"이렇게 하면 염색을 안 해도 되잖아"
"......"
"다행히 많지 않아서 길게 뻗은 것만 자르면 되겠다"

녀석은 군소리 없이 가만히 머리를 대어주고 있었다. 염색을 대신할 적당한 방법이 괜찮았었나 보다. 다초점 렌즈 안경을 쓰고도 하얀 새치 한 올이 가을바람을 맞은 억새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새치 한 가닥에 검은 머리카락 두어 개가 같이 잘려 떨어진다. 아들의 검은 머리카락을 지키겠다고 기어코 새치만 자르려고 눈에 힘을 잔뜩 주어 본다.



© almas_, 출처 Unsplash


긴 세월 동안 나는 시력을 내어주고 아들은 새치를 얻었다. 내 품에 안겨 아무것도 모른 채 옹알이를 하던 팔뚝만 한 녀석은, 가물가물 힘을 잃어가는 눈빛의 어미에게 어느새 하얀 새치가 돋은 머리를 맡기고 있다.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 낯설고 생경한 희미한 시력처럼, 아들도 문득 자신의 머리카락이 푸석하고 성글어진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쯤이면 부쩍 늙어 있을 것이다.

머리칼에 색을 입히고, 시간에 색을 입히며 그 색이 풀어지고 다시 덧칠해지는 사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다. 삐져나온 아들의 긴 새치를 잘라내며 내 등허리 뒤로 길게 내려앉은 지나온 시간은 무슨 색으로 칠해지고 더께가 앉았는지 잠시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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