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거미줄

by 파란 해밀





올해 마지막 휴가를 보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을 일인데 여행 갈 일이 없으니 연차가 남아돌아 하루 쉬기로 했다. 평일의 느긋함을 느껴볼 사이도 없이 아침부터 서둘러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안과를 다니러 갔다.

원래 계획은 안과 진료를 마치고 오는 길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으나 갑자기 추워진 날씨는 그 계획마저 꽁꽁 얼려버리려는 듯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세차게 부는 바람은 오로지 빨리 집에 가서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만 들게 했다.

그런데 평일에만 사용할 수 있는 무료 관람권이 오늘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되어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극장에 잠시 들러서 영화를 보고 갈 것인지, 너무 추우니까 곧바로 집으로 갈 것인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망설이다가 영화를 보고 가기로 했다. 조금 더 멀리 가면 내가 좋아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상영관이 있지만 도무지 거기까지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쿠폰을 사용하는 데 의의를 두기로 하고 스파이더맨을 보았다.





photo-1489599849927-2ee91cede3ba.jpg © felixmooneeram, 출처 Unsplash





평일 오전인데도 상영관에는 드문드문 관객들이 있었다. 예전에 봤던 스파이더맨에 비해 영화는 더한층 화려해졌지만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라며 꿋꿋이 인내심을 가지고 두 시간 반을 버텼다. 전현직(?) 스파이더맨의 연합작전(?)으로 무사히 거사를 치르고 영화는 끝을 맺었다.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상영관을 나오려는데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말을 건넸다.


"영상 두 개가 아직 더 남아있는데 안 보고 가시려고요?"
"그래요?"
"중간에 하나가 있고 마지막 엔딩 자막 끝나고 하나가 나와요"
"네"


굳이 들어와서 알려주는 직원의 성의가 고맙기도 하고, 이따금 쿠키영상의 재미가 쏠쏠했던 기억이 있어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보고 가기로 했다. 첫 번째 영상은 이내 나왔는데 두 번째 영상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선 채로 보고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맨 앞좌석에 다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쉼 없이 올가 가는 스크린은 온통 영화 관계자의 직책과 이름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빠른 속도로 지나는데도 끝을 모르는 화면은 조금의 여유 공간도 없이 계속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관계자들의 이름을 배달하고 있었다.





photo-1517486518908-97a5f91b325f.jpg © dmjdenise, 출처 Unsplash





'이제는 끝이겠지, 이젠 끝일 거야, 아직도야? 너무한 거 아냐?'

이왕 기다린 것 나머지 영상까지 보고 가려고 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자막은 안 보고 그냥 확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래도 여태 기다린 것이 억울해서라도 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네가 길면 얼마나 길겠냐? 하며 좌석 깊이 등을 구겨 넣고 지켜보았다.

눈에 잔뜩 독기(?)를 품고 바라보고 있었지만 전혀 굴하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꼬부랑 이름들은 하염없이 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래 하려면 해봐라'하고 나도 몸에 힘을 빼고 아예 작정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살짝 궁둥이만 걸치고 있다가 영상만 보고 후다닥 나가려고 했던 계획(?)이 보기 좋게 어그러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닥터 스트레인저는 돌아올 거라는 자막과 함께 쿠키영상이 끝났다. 그 영상이 끝나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갈 줄 알았는데 나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두 시간 반짜리 영화에도 저렇듯 연결되는 사람이나 관계가 많은데 60년짜리 내 삶의 영화에는 얼마나 더 많은 관계가 있었을까? 끝없이 올라가는 스파이더맨의 엔딩 자막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내게도 고마운 사람, 미운 사람, 좋은 사람, 끔찍한 사람,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나를 잊어버린 사람, 내가 잊어버린 사람도 있다. 그 숱한 사람과 관계 중에 내 삶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누구에게 가장 감사해야 할지 생각하며 느리게 느리게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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