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잘했어요" 커피 도장

by 파란 해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스타벅스에 테이크 아웃으로 커피를 주문할 때는 주로 패스트 오더나 사이렌 오더를 사용한다.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미리 주문을 하고 가면 기다릴 필요가 없어 여러모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도착할 시간에 나오지만 매장에 손님이 없으면 미리 만들어져 대기하고 있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럴 때마다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이걸 아무도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있네?'

누가 들고 가도 모를 일이다. "그저 ㅇㅇ번 맞으세요? ㅇㅇㅇ님이신가요?" 하고 구두로 물을 뿐 매번 종업원이 주문 번호나 본인 확인을 일일이 대조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도착하기 전에 누가 가져가도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내심 뿌듯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 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기꺼이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다.


호기심이 지나쳐 내가 한 번 슬쩍 남의 것을 가져가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배포가 되지 못해 아직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 Engin_Akyurt, 출처 Pixabay





일전에 베트남 여행에서 어느 카페에 들렀을 때 일이다. 커피 주문을 하고 결제를 하고 나니 영수증과 진동 벨을 주었다. 음료가 준비되면 한국에서처럼 진동 벨로 주문한 커피를 받아오면 되고, 영수증은 필요 없을것 같아 꾸깃꾸깃해서 버리려고 했는데 마침 주변에 휴지통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구긴 채로 가방에 넣었다.

얼마 후 진동 벨이 울길래 커피를 받으러 갔더니 종업원이 커피를 곧바로 주지 않고 베트남어로 뭐라 뭐라 한다. 갖고 있던 벨을 주었는데도 계속해서 뭐라고 하는 것을 내가 못알아 듣고 있으니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해주자 그는 그제야 "Bill, Bill" 하며 영수증을 요구했다.


'벨이 있는데 영수증은 왜 달라는 거야?'

하며 아까 구겼던 영수증을 찾았다. 숙소에 가서 버릴 심산으로 가방 안에 아무렇게 넣어둔 터라 한참을 뒤졌다. 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겨우 찾아서 그에게 내밀자 그는 영수증에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단어의 의미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음료를 전달했다는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 StockSnap, 출처 Pixabay





커피를 받아오면서 없어도 될 불필요한 절차가 의아했다. 이미 진동 벨로 주문한 고객이라는 것이 충분히 확인이 될 텐데, 굳이 한 번 더 영수증에 커다란 도장을 꾹 찍어대는 것이, 어쩌면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매번 진동 벨과 음료가 맞교환되는데 영수증으로 억지를 부린다는 것인지 내 머리로는 발생할지도 모르는 그 미연의 사고가 어떤 것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소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그다음부터는 나도 영수증을 잘 챙겨두었다가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는 아이처럼 직원이 찍어주는 스탬프를 꼬박꼬박 챙겨 받았다. 어쩌면 영수증을 그렁게 처리하는 것이 내가 짐작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람을 믿고, 그 믿음이 깨지지 않고 근간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이 시스템의 유지가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빈번하게 사고가 발생했다면 매장 직원들은 일일이 본인 확인을 해야 하는 번거로운 업무가 더 추가되지 않았을까?

어제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 미리 주문한 커피가 매장 판매대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그래도 꽤 괜찮은 곳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원한 커피가 술꾼의 달달한 술처럼 술술하고 잘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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