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 다른 의미

by 파란 해밀


체육센터 휴관일이라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갔다. 수영을 좋아하지만 휴관 덕에 모처럼 가볍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홀가분하기도 하다. 저녁을 먹고 TV 켰는데 마침 좋아하는 EBS "길 위의 인생"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자오족 여인의 삶을 다룬 내용인데 배경이 눈에 익은 듯 했다. 내레이션을 듣다 보니 그곳이 몇 년 전에 다녀온 베트남 북부에 있는 사파라는 것을 알았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타박타박 걸으며 돌아다녔던 사파가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노이에서 4시간을 넘게 달려 밤늦게 버스가 도착했던 메인 광장, 바로 앞에 있던 숙소, 쇼우를 만나고 헤어졌던 자리, 소수민족 여인들이 수공예품을 팔던 그 모퉁이까지 또렷이 떠올랐다.


오래된 벽화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해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훌쩍 날아갔듯이, 산 위로 펼쳐진 파란 논에 반해 4월 어느 날 사파로 떠났었다. 이제 막 봄 기지개를 켜는 사파의 정취는 가물가물한 내 어린 시절 아지랑이 피어나는 들판을 가슴 깊은 곳에서 들추어냈다. 4시간이 넘도록 트래킹을 하면서 연신 터져 나오는 탄성을 삼키며 언젠가 노란 가을의 사파를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내가 뻔질나게 지나다녔던 광장, 그곳에서 자오족 모녀는 밤새 만든 수공예품을 한 개라도 더 팔려고 했지만 번번이 여행자들은 손사래를 쳤다. 결혼 날짜를 잡아놓은 첫째 아들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는 밤새 잠을 줄여가며 수를 놓고 재봉틀을 돌렸지만, 몇 개 팔지도 못하고 해거름 녘이 되어 몇 시간을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살랑살랑 봄나들이 가듯 내가 걸었던 그 길을 모녀는 아무런 말 없이 팔지 못한 물건이 그득한 바구니를 메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들이 만든 소품은 마치 한 공장에서 만든 것처럼 디자인이나 색상이 비슷했다. 실밥이 삐져나와 끝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았고 지퍼가 어설프게 달려 눈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필요성과 충분성을 따졌던 물건들이 그들에게는 간절함이었다. 한 개 2, 3천 원 하는 소품 몇 개를 팔아야 아들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 어머니는 아들의 지참금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몸이 아파도 일을 해야 하고, 잠을 줄여 수를 놓아야 했다.


사파 광장에서 3, 4만 원 하는 이불 사이즈의 커버를 샀을 때 그것을 팔던 젊은 아낙의 표정은 유달리 밝아보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의아했는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젊은 아낙도 자오족 어머니와 별반 다를 게 없을 어려운 살림에 큰 걸 팔았으니 매우 기뻤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커버를 펼치며 그 아낙의 손 끝이 스친 자리를 훑을 때마다 턱없이 싼 값이 미안했다.



EBS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자오족 어머니의 손톱은 온통 새까맣게 염색물이 베어 있었다. 빼곡히 색실로 수를 놓아 천을 채우다 보면 어느새 깊은 밤도 숨을 죽이고, 희미한 헤드 랜턴 불빛만 낡은 재봉틀을 돌리는 그녀를 졸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담장 밖, 풀숲에 섞인 거친 호박잎도 밤새 어머니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이슬이 맺혔을 테고, 속절없이 찾아오는 아침에 어머니는 또 고단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내게는 그림 같은 여행 풍경이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버거운 일상이기도 하고, 내게는 그저 필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절박함일 수 있겠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벗어나고 언젠가 다시 여행길에 나서게 되면 내 여행 저편의 그림자에도 잠시나마 시선을 머물러 볼까 싶다.


사료 대신 삶아주는 담장 옆 호박잎이라도 밤새 쑥쑥 자라길 바래본다. 궁핍한 살림에 돼지 먹일 땟거리 걱정이라도 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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