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오르가슴

by 파란 해밀




오랜만에 진동이 남는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다. 영화는 오르가슴이 시발점이다. 남편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오르가슴을 느껴보지 못하고 연기만 하고 살았던 낸시는 은퇴 후 버킷리스트로 그것을 체험하고자 한다. 종교 윤리학 교사였던 그녀에게 이것은 커다란 갈등의 장벽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오르가슴은 간절했다. 그것은 그저 육체적 쾌락의 정점을 경험하기 위한 것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도움닫기를 위한 구름판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성매매를 하는 청년 리오 그랜드를 만나 낸시는 힘차게 인생의 도움닫기에 성공한다.

처음으로 느낀 오르가슴을 통해 수 십 년 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가치가 편협된 인식의 오류임을 깨닫게 된다. 오르가슴 자체가 생각을 바꾸게 했다기보다는, 그러기까지 그녀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겪었던 내적 갈등으로 인해 생각의 물꼬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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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언제나 이성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단 한 번도 받기 싫은 전화를 거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그녀의 멍에가 내 목덜미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언제나 견고한 갑옷을 두르고 아내와 어머니로서 있어야 할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며 살았고, 종교 윤리교사라는 직업은 더욱더 경직된 사고의 더께가 되어 그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자신의 갈망, 여전히 이성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낸시의 갈등을 지켜보며 나는 속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화 워낭소리를 보았을 때나, 어린 왕자를 읽고 나서 나왔던 눈물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전혀 슬픈 영화도 아니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포인트도 아니었는데 아마도 낸시를 통해 나를 보았던 것 같다.

도덕과 이성이 나를 바로 세우는 버팀목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지독하게 힘들게 할 때도 있었다. 해야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선이 분명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흔들려서도 안 되고, 주저앉아서도 안 되게 만드는 독한 각성제 같은 것이었다.

사는 동안 어찌 한두 번 정신 줄을 놓고 싶은 적이 없었을까? 나도 힘없이 흔들리고 싶은 적이 왜 없었을까? 단지 내가 그랬을 때 그 뒤에 뻔히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낸시가 심하게 갈등하는 모습에서 매양 흔들리지 않으려고 맨정신으로 버티던 나를 보는 듯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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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둥지를 떠나고, 직장으로부터 벗어나고 나니 비로소 스스로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오르가슴이 그녀에게는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그녀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이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 가 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만날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간절함을 모른 척 포기한다면 두려움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인식의 가치를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낸시는 이 두려운 도전을 통해 불필요한 생각의 무게를 덜어내고 새로운 가치를 담을 수 있었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대여섯 명이 고작이다. 리오 그랜드의 어머니는 대화 도중 이야기 속에서만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낸시, 리오 그랜드와 그의 어머니, 낸시의 제자까지 각자 다른 위치, 다른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영화였다.

입장이 다르니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인간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율해야 할 지도 한 번 짚어보게 된다. 무엇보다 나와 비슷한 낸시의 나이나 상황, 갈등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보다 보니 영화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한결 밝아진 낸시의 얼굴을 보며 내 삶의 오르가슴은 무엇인지 무겁게 울리는 물음표 하나를 받아 들고 영화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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