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가 되면 수영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요즘은 해가 길어지고 날씨가 풀려서 덜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운 겨울 날씨에 어둑어둑한 길을 나서는 게 싫을 때가 있었다. 퇴직 전에야 일을 마치고 곧장 수영장으로 가니 그다지 갈등할 일은 아니지만, 따뜻한 집 안에 있다가 새삼 나가는 것이 이따금 꾀가 나곤 했다.
퇴직하자마자 낮 시간대로 옮길까 하는 생각을 진작했었지만, 낮에는 여러 가지 일로 활용하고, 저녁은 덤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라 그동안 하던 저녁 수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겨우내 갈등을 하면서 수영 시간을 오후 3~4시쯤으로 옮겨 볼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다음 달 수업에는 시간대를 한 번 옮겨 볼 심산으로 알아보니 나한테 딱 맞는 3시, 4시 수업이 있었다. 4시 수업을 검색해 보니 자격 요건이 있었다. 실버 수영반으로 만 60세 이상이 되어야 등록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자격 미달로 지원조차 하지 못하면 참으로 맥이 빠진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자격 요건에 합격을 했는데도 그것이 영 달갑지 않고 오히려 당황해하는 나 자신에게 적잖이 놀랐다.
젊은 날, 아무런 무게 없이 말하고 들었던 실버타운, 실버산업, 실버 프로그램...... 등이 이제는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렇게 마음을 다 잡고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고 자신했는데도 갑자기 붙은 "실버"라는 타이틀이 또다시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갑자기 어느 영화의 대사 한 마디가 떠올랐다.
"내게 늙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어........"
30대의 내게 60의 이 일렁임을 누군가 얘기해 주었다 한들, 내가 제대로 공감할 수 있었을까?
40대의 내게 아직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이 낯선 60의 거리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절대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막연하게나마 미루어 생각해 보지는 않았을까 싶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다.
스무 살이든, 서른 살, 마흔 살이든 모두 어제보다 하루가 늙었고, 한 달 보다, 일 년 전보다 시간이 흐른 만큼 공평하게 늙어간다. 단지 늙어간다고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30대의 두 아들이 세월이 참 빠르다고 이따금 아쉬워하지만, 자신들이 늙어가고 있다고 여기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그 대사처럼 늙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누군가로부터 진지하게 들어 본 적이 없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본 적도 없다. 세월이 가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겪는 일이니 겪으면서 느끼고, 느끼면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각자 스스로 감당하고 헤쳐 나가야 할 일이라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살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러 조언은 하지만, 어떻게 늙을지, 늙는 것이 어떤 건지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얗게 올라온 새치가 영화배우의 그것처럼 전혀 멋지지 않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지하철에서 좌석 양보를 받을 때,
모르는 꼬마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을 때,
노인이라서 각종 혜택을 받을 때,
벚꽃 잎보다 더 커다란 검버섯이 얼굴에 피었을 때,
횡단보도를 뛰어가는 게 예전처럼 쉽지 않을 때,
한 발자국 떼는 것조차 힘들어질 때,
우리는 그제야 늙음을 절감하지 않을까?
젊음을 다시 체험해 볼 수 없듯이, 늙음을 미리 연습해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지금보다 더 시간이 지난 후 나의 늙음을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가끔은 생각해 보고 준비해야 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당황하고 놀라서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해가 길어져서 저녁으로 집을 나설 때 많이 환해졌다. 어둡고, 추운 날씨 때문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아도 되어 그대로 저녁 수영을 등록했다. 수영 후에 덤으로 잠을 잘 잘 수 있어서 그것도 선택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굳이 실버를 피하고(?) 싶어 낮 수영을 등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버가 내게 던진 의미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앞으로 살면서 더 새롭고 생소한 늙음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나는 실버로 내 생각을 코팅한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늙는 것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늙음을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만 남길지, 나를 숙성시키는 과정으로 만들지는 내가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또 오늘 하루를 늙어가면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 생각을 넓히고 그 사이로 나를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