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그림을 그리다 어깨가 탈이 탄 이후 하루에 한 장 정도만 그림을 그린다. 마음은 부지런히 연습을 해서 얼른 내 맘에 드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막상 몸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는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 마음을 조금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그날도 절제된(?) 그림 한 장을 그렸다. 머릿속에는 어떤 색깔과 분위기로 그릴지 계획이 뻔한데, 생각과 달리 손은 잘 따라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몸과 마음은 원활한 대 화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 가는 대로 손발이 호락호락 움직여주질 않는다.
더구나 처음 접해보는 수채화의 기법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날도 용기 있게 시작한 그림은 점차 엉뚱하게 그려졌다. 다른 색을 입혀보고, 다시 색칠을 해도 내 맘에 들기는커녕, 그림은 내가 의도한 것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부아만 가득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그리던 그림을 버렸다. 그동안은 잘 못 그려도 그것도 내 그림이 자라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점점 어두워지는 그림에 화가 치밀어 눈에서 치워버렸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분이 풀리지 않아 '나는 여기까지인가? 때려치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얼마나 흘렀을까? 치밀었던 부아도 조금 가라앉았다. 오다가다 분리수거하려고 모아둔 종이박스에 눈이 갔다. '에이! 저건 버린 그림이야' 하고 몇 번 지나치다 저녁 무렵에 종이 박스 귀퉁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림에 눈이 다시 갔다.
'어! 다시 보니 좀 괜찮네?'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박스에 버린 그림을 주워 들고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이는 물감을 머금고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내 맘에 쏙 드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깔아 놓고 있었다.
기분 좋게 빨리 완성되는 그림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감과 종이의 결합이 빚어내는 조화가 생각지도 않은 변화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 그림이 마르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그러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았고, 급한 마음에 자꾸 덧칠을 하다 보니 그림은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조금 전까지 안 되는 그림에 메여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 매우 흡족하게 고쳐진 것은 아니지만 잘 그린 만족 그 이상의 의미를 깨달았다. 사는 동안 나는 어쩌면 버린 그 그림처럼 그 안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속단하여 섣부른 결정을 하고 살지는 않았을까?
설령 내팽개쳤더라도 다시 한번 마음을 되돌려 생각하면 이전에는 알지 못한 면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그림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미처 기다리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떠내려 보낸 것들이 내 삶에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지로 완전히 버려지기 전까지 한 번 더 바라봐 달라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림 같은 존재가 주변에 없는지, 그것을 어리석게도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 되새겨본다.
A4 용지의 작은 그림은 그저 색색의 물감을 입은 종이가 아니라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을 알려주며 작은 파문을 던지듯 물과 함께 종이와 내 속에 소리 없이 번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