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초콜릿

by 파란 해밀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 추운 날씨 탓에 한동안 집에서 그림만 그리다가 모처럼 찾은 극장은 새삼 새로웠다. 코로나가 잦아들어서 인지 객석에는 예전보다 드문드문 자리를 채운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영화는 기대보다 미치지 못해 중간에 나올까 말까 갈등을 했다.

그렇게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아침을 가볍게 먹은 데다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터라 지루한 영화와 허기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조금 지나면 뭔가 있겠지 하며 버티고 보던 영화는 아무나 찍어 올린 일상의 동영상 같은 밍밍한 스토리로 결국 끝이 났다.










실망한 영화에 대한 분풀이인지 배가 본격적으로 고프기 시작했다. 3시쯤 영화를 마치고 지하에 있는 마트를 갔을 때는 허기를 지나 당이 떨어져 금방이라도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았다. 배고플 때 장에 가지 말라더니 막상 허기가 지니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대로 먹고 싶어졌다.

당 떨어질 때 한 번씩 먹는 큼지막한 코코넛 요거트 하나를 담고, 갑자기 구미가 당기는 새콤달콤 유부도 담았다. 그러다 계산하러 가는 길에 초콜릿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나이 먹도록 내 돈으로 초콜릿 하나 사 본 적이 없는데 그날따라 달콤한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고를까 한참을 고민하다 제법 크기가 있는 다크초콜릿 하나를 집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안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자마자 허겁지겁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다크초콜릿이라 그런지 달콤하기보다는 쌉싸름한 맛이 더 강했다. 그만해도 살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초콜릿 포장을 봉해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까처럼 당이 떨어지면 하나씩 먹어야겠다 싶었다.









저녁에 운동을 하고 온 아들은 닭 가슴살 한 봉지를 저녁 삼아 먹었다. 운동 후에 느끼는 기분 좋은 나른함과 허기가 내게도 전해지는 듯 했다. 격렬한 운동 후에 먹는 포도쥬스처럼 초콜릿을 권했다.


"여기 초콜릿 있는데 먹으려면 먹어"
"네. 내일 아침에 먹을게요"


아들은 운동하고 온 날은 닭 가슴살 외에는 절대 다른 건 먹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는 게 있어도 꾹 참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먹곤 한다. 초콜릿이야 그렇게 맛있는 것도 아니니 아침부터 무슨 초콜릿을 먹겠나 싶었다. 그저 내가 권하니까 대답으로 한 번 하는 소리려니 했다.










다음 날 아침, 닭 가슴살을 넣어 유부초밥을 만들었다. 허기가 지던 어제는 입덧하는 임산부처럼 새콤달콤한 유부초밥이 그렇게 당기더니 만들면서 두 개 정도 먹고는 영 당기지 않는다. 한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았더니 녀석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 오다가다 집어먹었다.


유부초밥 한 접시를 뚝딱 비우고는 현관에서 잘 다녀오겠다고 출근 인사를 하는 녀석의 가방에 어제 샀던 초콜릿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초콜릿을 회사 가서 먹으려고?"
"아뇨. 가면서 먹으려고요"
"이렇게 큰데 다 먹을 수 있어?"
"네"
".........."
"다녀오겠습니다"









비상식량처럼 당 떨어지면 한 조각씩 떼어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녀석도 나처럼 몇 조각 떼어먹을 줄 알았다. 아들과 나눠 먹어도 전체에서 반은 남으려니 했는데 녀석은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귀퉁이만 겨우 먹고 남은 초콜릿을 통째로 들고 갔다. 그것도 아침에 유부초밥 한 접시를 거나하게 다 비우고 말이다. 배가 부른데 초콜릿은 어찌 들어가나 싶다.


'다 먹을 수 있냐?'라는 말은 '좀 남겨 놓고 가지.....'를 에둘러 한 말인데 아들은 같은 모국어를 쓰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마치 큰 칼 옆에 찬 장수처럼 커다란 초콜릿 한 통을 자랑스럽게(?) 찔러 넣고는 씩씩하게 출근을 했다.

'그래. 너는 좋겠다. 오늘 당 떨어질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문이 닫히는 사이로 사라지는 녀석의 짙은 외투가 순식간에 빼앗긴(?) 초콜릿처럼 진하다. 현관에서 돌아서는 내 마음이 갑자기 쌉싸름해진다. 진한 생강차 한 잔 하러 물 한 주전자나 펄펄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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