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너무 이른 시간, 식사 시간, 혹시나 운동을 할지도 모르는 시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서 그래도 지금쯤은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 오후에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무심한 신호음만 계속 울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조심스럽게 번호를 눌러보았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세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음성에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할 틈도 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세요"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세요"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세요"
몇 번을 걸었지만 매번 똑같은 음성만 반복해서 들려왔다. 달리 연락해 볼 방법이 없었다. 주변에 알만한 사람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나는 그다지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예전에 다니던 피부관리실 원장과 고객 사이였으니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다. 그마저도 가게를 정리하는 바람에 6개월 정도밖에 다니지 못했으니, 이전에 10년 넘게 다녔던 관리실에 비하면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항상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게 운영이 어려워 월급 관리사로 일하게 되면서 '언니, 가끔 만나 차 마시고, 영화 보러 같이 가요' 하던 그녀의 말에 나도 그저 인사치레로 '그래요' 하고 헤어졌는데 내 마음은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었던 것 같다.
관리를 받으러 갈 때마다 마치고 나서 점심을 먹고 가라는 그녀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차츰 알아갈수록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란 것을 느끼면서 조금씩 편해졌다. 그래서였는지 인사치레로 '그래요'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속에 그녀가 늘 걸쳐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생각이 나서 전화를 몇 번 걸었으나 받지 않다가 그녀의 남편이 전화를 받고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직장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뇌출혈로 쓰러져 전신 마비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가 한창 유행하던 때라 병원을 찾아가 볼 수도 없었다. 처음보다 나아지고 있으니 더 좋아지면 아내에게 전화기도 전달할 거라는 남편의 얘기에 조만간 통화라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 후로도 생각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었지만 길게 신호음만 울릴 뿐 그녀도, 그녀의 남편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방적인 신호음이 참 무심하게 여겨지더니, 그나마 신호라도 가니 그 너머에 그녀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열심히 재활해서 더 나아지고, 병원 면회도 가능해지면 꼭 통화해서 찾아가 봐야지...... 만나게 되면 어디서 이야길 할까? 빛이 좋은 창가에 앉아서 그동안 쌓인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지.....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할지도 모를 그녀를 가만히 안아 주고 와야지.....
그때는 뭘 사 가면 좋을까? 하며 나는 마치 이솝 우화 '아가씨와 우유 항아리'의 그 아가씨처럼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동안 막연한 기대를 품게 했던 신호음마저 가시고 번호가 없다는 냉랭한 말만 되풀이했다. 퇴사한 직원의 빈자리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부재나 연락 두절로 이렇게 애를 태워보긴 처음이다.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참담함에 어디로 연락하면 될지 몰라 팔짝거리며 머리를 굴리던 기세가 아무런 수가 없다는 것을 안 순간 데쳐진 우거지처럼 순식간에 찌부러지고 만다.
그냥 전화번호가 바뀌어서 그럴 거야......
그래, 그럴 거야.....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을 거야......
나와 연락이 안 되어도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와의 연락이 그녀의 재활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 그녀와의 연락 두절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온전히 털어내지 못하는 것은 미련스럽게 나중에, 나중에 하고 뒤로 미룬 어리석음이 후회되기 때문이다. 늙어가면서 돌아보니 제때 다 하지 못한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고,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화기 너머 그녀가 꼭 있기를 바라며 쾌차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