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둥에서 기차로 6시간을 달려 족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잘 견디고 있더니 족자에 도착하자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짐을 끌고 다니는데 비가 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 이동할 때마다 그러니까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려고 한다.
족자역에 도착하고 나서 이중으로 예매한 말랑행 기차표를 취소해야 해서 무작정 정복을 입고 있는 직원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말로 설명하다가 안 되겠는지 다른 직원을 불러 데려다주라고 하는데 가는 길이 참으로 험난(?)하다. 철로를 가로지르고, 사람들이 타고 있는 전철을 건너고 한참을 더 따라갔다. 역시 혼자서는 찾기 힘들었을 곳에 Ticket Counter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를 보고 있다가 또 정복을 입고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번호표 한 장을 뽑아준다. 순번을 기다렸다가 고객센터라고 적혀있는 곳에 가서 예매내역서를 보여주며 취소를 해달라고 했다.
취소하는데 수수료를 거의 25%를 떼어간다. 완전히 날강도다. 시일이 지난 것도 아니고 취소 가능한 티켓이라서 웃돈을 더 주고 샀는데도 엄청난 수수료를 착취(?)해 간다. 6만 원대에 산 티켓을 4만 원대로 겨우 돌려받았다.
그나마 취소 가능한 티켓을 샀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전액을 홀랑 날릴 뻔했다. 인도네시아는 취소 여부에 따라 티켓 가격이 다르고 취소에 따른 상당한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
괜히 심통이 나서 한국에서는 취소를 포함한 모든 절차가 무료라고 매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담당 직원의 깜짝 놀라는 똥그란 눈을 보고서야 잔뜩 부은 심통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얼마나 좋은지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겨우 차를 잡았다. 족자역에서는 고젝으로 차를 잡는 게 다른 곳과 좀 달라서 당황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다.
예약한 숙소는 매우 넓고 쾌적했다. 앞의 두 도시에서 숙소가 맘에 들지 않아 불편했는데 그동안의 아쉬움을 한방에 보상받는 것 같았다.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홈스테이인데 방 3개만 운영하고 있어서 매우 조용하고, 모든 시설이 4성급 호텔 이상이 부럽지 않다.
넓은 욕실에서 씻고, 또 씻고, 넓은 침대에 대자로 누우니 장시간 이동하고 이리저리 헤맨 피곤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미리 예약해 둔 차량으로 보로부두르 사원과 프롬바난 사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 않았다. 함께 간 기사가 알아서 진행을 척척 해주니 무지 편하다.
입장료는 외국인은 내국인보다 거의 3배 가격을 내야 한다. 그게 미안해서인지 사원에 올라가기 전에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신발을 바꿔 신으라고 공짜로 슬리퍼를 나눠준다. 나름 사이즈도 고를 수 있어서 제일 작은 걸 골랐는데도 크긴 하지만 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신을만하다.
게이트를 통과하고 나서도 10명의 그룹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인원이 되면 지정해 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투어를 하면 된다. 기대하지 않은 가이드가 있어서 어느 정도 도움은 되었지만, 엿가락처럼 똑똑 부러지는 발음 때문에 놓치는 부분도 많다
산초 씨처럼 까맣게 그을린 가이드는 하루 두 번 설명을 한다고 한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 지겨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하나라도 더 주워들으려고 모든 신경을 그의 말에 기울였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90%가 무슬림 교도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불교사원이 만들어졌는지 궁금했다. 보로부두르사원은 840년경에 만들어졌으나 화산 폭발로 인해 천 년 가까이 재에 묻혀 있다가 영국인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
층층별로 불교의 3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자꾸 앙코르와트가 생각난다. 훨씬 더 정교한 앙코르와트의 현란한 조각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자식도 비교하면 안 되는데 국가의 문화유산을 견주었던 내 맘을 들키지 않으려고 마른침만 꿀떡 삼켰다.
정상까지는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동안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4월부터 다시 개방되었다고 하니 재수라면 재수다. 물론 Top까지는 80,000루피아를 더 내야 한다. 입장권이면 당연히 정상까지 포함을 해야지 그걸 또 층을 나누어서 돈을 더 받는 얄팍한 상술에 어이가 없다.
한 시간가량의 투어를 끝을 내고 힌두교 프롬바난 사원으로 출발했다. 이곳은 보로부두르사원과 달리 가이드가 없고 원하면 개인 가이드를 시간당 150,000루피아에 고용해야 한다.
앞에서 너무 가이드만 쫓아다니기 바빠서 이번에는 가이드 없이 천천히 다니기로 했다. 사원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상당히 넓은 정원으로 잘 꾸며져 있다.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는지 가는 곳마다 왁자지껄하다. 어딜 가나 청춘의 열기는 주체가 안 되는 것 같다. 연신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여학생들은 한 여름에 히잡을 쓰고도 요염한 자태를 한껏 뽑아낸다. 성스러운(?) 사원을 뒤에 두고 저렇게 섹시한 포즈를 취해도 되나 싶지만 어쨌든 그들의 젊음과 활기가 더위도 날려버릴 것 같다.
팸플릿을 들고는 갔지만 아무래도 가이드 있는 것만은 못한 것 같다. 마침 뒤에서 영어로 안내하는 다른 일행의 가이드가 설명을 하길래 안 듣는 척하며 슬금슬금 따라다니며 도강을 하기도 했다.
그것도 도둑질이라 눈치가 보여 대놓고 길게 하지는 못했다. 이 가이드에 붙었다가 저 가이드에 붙었다가 하며 조금씩 훔쳐 듣다 보니 어느새 출구가 나왔다.
가이드 없이 돌아봤는데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주차장 출구로 나오는 길은 교묘하게 많은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방문객들의 시선을 허투루 날려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다른 길을 찾아서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상점들이 가득 들어찬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나가야 했고,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의 호객행위를 계속 뿌리쳐야 했다.
오로지 출구라고 쓰인 팻말만 보고 걷다 보니 드디어 출구가 나왔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보다 나오는 길이 더 길게 느껴진다.
아침에 차량기사를 만나 출발하면서 그는 루왁 커피점에 가 볼 것을 추천했다. 그는 그의 본분에 매우 충실(?)하고 있었다. 그의 속내가 뻔히 보였지만 작년에 달랏에서 샀던 루왁 커피를 맛있게 마셨던 기억이 있어서 그의 꼬드김에 기꺼이 넘어가기로 했다.
손님이 별로 없는 덕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일사천리로 설명을 해준다. 루왁 커피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왜 가격이 비싼지 그 이유가 담긴 영문 자료를 보여주며 비싼 가격에 대한 마취제를 놓는다.
달랏에서도 이미 비싸게 사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곳은 달랏보다 더 비싸다. 100그램에 약 33.000원 정도다. 이미 마신 커피 한 잔에 나는 정신을 잃고 300그램을 샀다. 세 봉지를 사니 선심 쓰듯 조금 할인을 해준다.
가게 앞에는 루왁 세 마리가 철창 안에 갇혀있다. 내가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직원은 지금 자는 중이라고 하는데 자는 건지 의욕이 없는 건지 그건 잘 모를 일이다.
소화도 되지 않아 고스란히 나오는 커피를 좋다고 먹는 루왁이 어리석다고 얘기했더니 커피 열매의 향이 좋아서 먹는다고 직원이 알려준다. 어쨌든 가게 주인은 동물에게 생똥을 싸게 해서 돈을 벌고, 나는 또 그게 맛있다고 돈을 주고 산다.
제 똥 세 봉지를 챙긴 죄로 녀석과 오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아침부터 설친 하루가 어느새 해거름으로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