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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둥에서 빈둥빈둥......

by 파란 해밀



어제 차량 투어를 할 때는 피곤한 줄 모르고 다녔는데 자고 나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마음 같아서는 늦게 일어나고 싶은데 오늘 날씨도 오후에 비를 예보하고 있어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첫날 사놓은 식빵과 잼으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숙소에서 멀지 않은 스타벅스로 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가게 안은 한산하다. 자카르타에서는 커피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더니, 반둥은 아메리카노가 3,500원 정도로 가격이 착하다.





창 가에 앉아 카페인을 충전하고 있는데 마침 옆에 아시아, 아프리카 박물관이 보인다. 아무런 계획 없이 나왔는데 가볼거리가 생겼다.


출입구를 찾아 들어가려고 하니 QR코드를 찍고 거기서 요구하는 모든 인적사항을 기입해야 했다. 기재 사항이 제법 있어서 방문객이 몰리는 상황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기재하고 접수완료가 뜨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들어가서도 또 구두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이중 절차였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곳은 1955년 4월 아시아, 아프리카 30개국 대표단이 모여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선언한 회의로, 이후 이를 계기로 추가로 독립한 국가가 있었으며 당시에 컨퍼런스가 반둥에서 열린 것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반둥 시내에 아시아, 아프리카 거리가 있을 정도이니 이 회담에 대한 긍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간다. 실내에는 회의와 관련한 다양한 사진과 당시 이용되었던 카메라, 사진 프린터기, 연설을 녹음한 레코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에는 당시의 진지한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전쟁을 빼고는 역사를 논할 수 없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다.






1층에서 모든 전시가 끝이 다. 특별히 훔쳐갈 만한 것도 없는데 2중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무래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혼자 샐쭉해서는 박물관을 나섰다.


다음 블럭에 재미있게 생긴 버스 4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버스 머리에 반둥 시티 투어라고 적혀 있어 가까이 가 보았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버스 투어 일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버스를 타고 싶다고 하니 멀리 떨어져 있는 영어가 가능한 다른 직원을 불러준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그 직원이 오더니 이 차량은 오늘 수학여행을 온 단체학생들을 위해 예약된 것으로, 일반인은 다른 장소로 가서 다른 투어버스를 타야 한다고 한다.


나는 재미있게 생긴 이 못생긴 버스를 타고 싶다고 우겼더니, 그럼 인솔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탈 수 있을 거라고 일러준다. 학생들은 옆에 있는 박물관 관람 중이라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직원은 자동차 안으로 자리를 권하며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있는 젊은 직원의 영어 스피킹을 위해 얘기를 나누어주면 인솔 선생님에게 자기가 잘 얘기해서 차를 꼭 태워주겠다고 한다.


의외의 좋은 조건에 거래(?)가 성사되었지만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야 했다. 내 코도 석 자인 영어 실력에 늘 스트레스를 받는데 발음이 좋다며 나를 단타 강사로 쓰겠다니 왠지 내가 짝퉁을 팔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한참 동안 버스 안에서 그들과 떠들었지만 학생들은 박물관을 나올 기색이 없다. 조금 더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더 이상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인사를 하고 빠져나와 브라가 거리로 갔다.


명성대로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늘어선 상점을 따라가다가 가게 밖에 벤치가 보여서 어반스케치를 하려고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실내 작업만 하고 겨우 밖에서 한 번 그린게 전부인데 남의 나라에 와서 잘 될지 의문이지만 시도해 보기로 했다. 잉크를 쏟을까 봐 즐겨 쓰던 만년필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어떻게든 시도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장차 어반스케치는 나의 여행동무이자, 인생의 새로운 반려가 될 대상인데 이번이 해외에 나와 처음 데뷔(?)하는 첫 무대인 셈이다





주로 실내에서만 작업을 해서 잘 될지 모르겠지만 그냥 시도하는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어반 스케치는 앞으로 내게 좋은 여행동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카메라 대신 선택한 길동무이다.


많이 쑥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간혹 와서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고 말고 가 아니라 시도하는데 의미를 두고 해외 첫 무대에 무난히 데뷔(?)를 한 셈이다.





오다가다 쳐다보는 사람도 있고, 용감하게 말을 걸거나 번역기를 돌려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다지 불편하지 않으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을 확인한 첫 신고식을 나름 잘 치른 것 같다.





하루 중 한 끼는 잘 먹자 싶어 이름 있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신의 한 수였다. 감자튀김만 남았을 뿐 나온 음식을 모처럼 맛있게 먹었다. 나중에라도 기억이 날 만큼 마음에 드는 선택이었다.





점심을 먹고 근처를 배회하다 보니 그림 전시장이 있어서 다짜고짜 들어갔다. 색감과 볼륨감이 좋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작가가 다가와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여준다.


나올 때는 작은 소품도 작업실에 많이 있으니 한 번 놀러 오라며 명함을 건네준다. 그러겠다고 인사치레로 답은 했지만 가난한 여행자의 주머니 상황도 그렇고, 짐도 늘릴 수 없어 눈에 듬뿍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갤러리에 있을 때 세찬 비가 내리 꽂히기 시작하더니 나올 때 즈음 슬며시 비가 그친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내 발길에 맞춰주는 것 같아서 무지 고맙다. 반둥에서 3일째는 거의 이 거리에서만 죽치고 있었던 것 같다.





갤러리를 빠져나와 무작정 걷다 보니 또 다른 전시장이 눈에 띄었다. 주로 소품 위주의 진시였는데 입장료가 12,000루피아로 작품 수가 꽤 되어서 다 돌아보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개중에는 한두 점 맘에 드는 그림도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돌아다니다가 피곤하면 커피점에 들어가서 글을 쓰거나 쉰다. 예전처럼 뺑뺑이를 돌 체력도 안 되지만 내가 원하는 여행이 그런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한 곳에서 누군가와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어도 내겐 의미 있는 여행이다. 그래서 아직도 크로아티아 모토분에서 기념품을 팔던 아가씨의 신세 한탄을 들어주며 보냈던 두 시간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여행은 그렇게 낯선 곳에서 누군가의 속내를 들어주기도 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속내를 내려놓을 수도 있어서 편하다. 그래서 낯선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때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깜짝 선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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