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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둥의 남으로.....

by 파란 해밀



자카르타를 출발해 반둥에 거의 도착할 즈음, 그동안 참아왔던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마자 양동이로 냅다 들이붓는 것 같았다. 다행히 출구까지는 이어진 지붕이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고젝으로 차를 불러 비를 뚫고 왔더니 숙소가 셀프 체크인 아파트다. 한동안 우왕좌왕 하다가 겨우 입실을 했다. 다시는 셀프 체크인 숙소는 예약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몸도 피곤한데 이리저리 키를 찾아다니고, 숙소에 관해 문자로 묻고 답을 듣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만족하는 답이 재깍 오지 않아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려고 할 때쯤 모든 게 해결되었다.





오후 내내 내리 꽂히는 장대비 때문에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늦은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하고. 슈퍼에서 물과 필요한 것들을 사서 돌아왔다.


한국부터 계속 이동만 한 것이 피곤이 많이 누적되었다. 다음 날 아침 반둥 남부로 가기 위해 차량투어를 신청한 게 있어서 체력을 아껴야 했다. 단체 투어를 할까 했지만 편하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비용이 좀 있어도 혼자 가기로 했다.





일기예보는 여전히 오후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올 확률이 80%이다. 우기를 피해서 온다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 5월도 우기와 건기가 공존하는 때라고 한다. 본격적인 건기는 6월부터 8월까지인데 그때는 푹 삶길 각오를 하고 와야 할 것 같다.


다행히 비만 아니면 아직 선선한 게 다닐만한데 날씨가 워낙 변덕이 심해서 볼불복이다. 달랏에 있을 때처럼 최대한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차량을 8시에 예약했다.





8시 10분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차랑 기사로부터 길이 많이 막혀서 20분 정도 기다려달라는 문자가 왔다. 오늘이 월요일이란 걸 깜빡 잊어 교통체증을 감안하지 않고 출발했다는 것이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데 문자를 보는 순간, 속에서 뭔가 톡! 하고 치받쳤지만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8시 30분에 예약한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차량은 정각 8시 30분에 도착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쏟아내었다. 오토바이와 차량이 뒤섞인 반둥 시내를 헤엄치듯 빠져나가 얼마나 달렸을까 한적한 고속도로가 끝나자 그림에서나 나올법한 아늑한 시골동네가 나왔다.


반둥시에서 2시간을 달려 까와뿌띠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 화산으로 생긴 호수가 있는데 유황이 섞여 있어 색깔이 민트빛으로 오묘하다. 신비한 색깔에 비해 유황 냄새 때문에 호수에 도착하자 금방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규모가 작아서 둘러보기에는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지만 계속된 두통 때문에 더 오래 머물 수도 없어 호수를 빠져나왔다.


클룩으로 예매한 차량의 기사는 반둥 투어의 전문가였다. 남부 일대의 뻔한 투어 장소를 내가 일일이 대지 않아도 일신천리로 데려다주었다. 그중에 그다지 관심 없는 사슴 농장, 딸기 농장 등 뻔한 몇 군데는 생략을 했다.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 하늘의 눈치를 보며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기사가 열거한 장소 중에 까와뿌띠, 출렁다리, 그리고 잠시 들른 한적한 호수가 가 볼만했다.


교외로 빠져나가는 투어라서 별도의 추가 비용이 들었다. 유류비, 까와뿌티 정상 차량운행, 기사 점심, 톨비, 팁, 주차비 등 지날 때마다 돈이었지만 하루 종일 차량 렌트와 안내를 받고 10만 원 초반대 금액이 들었으니 적지도 과하지도 않은 것 같다.





기사가 영어를 곧잘 해서 가는 내내 인도네시아 생활상에 관한 것들을 들을 수 있어서 그것도 덤이라면 덤이다. 가끔 잿빛구름이 시커멓게 몰려들고 천둥이 치곤 했다. 천둥소리에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우산이 무색할 정도라서 어떡하든지 비가 오기 전에 마무리하는 게 대수다.





까와뿌띠를 떠나 suspenshion bridge를 갔다. 만들어진 지 6개월 정도밖에 안 된 따끈한 출렁다리다. 길이가 백 미터 정도 되는데 출렁거리는 느낌이 스릴이 있어 재미있게 걸을 수 있다.


무슬림 신도인 기사는 기도 시간이라며 간략하게 둘러보는 방법을 알려주고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풀코스를 둘러볼 수 있는 티켓을 사면 이동 바스켓을 이용할 수 있다. 약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공간을 와이어에 매달린 바스켓을 타고 이동하는데 생각보다 무섭지 않아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순서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모처럼 낯익은 한국어가 들려서 돌아보니 젊은 한국 청년 둘이 있었다. 20대 후반인 그들은 고등학교 동창인데 직장을 퇴직하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6개월가량 배낭여행을 위해 다니고 있다고 한다.





젊으니까 가능하고, 젊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행 후의 밥벌이는 한국에 돌아가서 생각하겠다는 그들의 배짱(?)이 용감했다.


과연 내 아들이 그러겠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선뜻 격려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나이를 묻는 질문에 벌써 20대 끝자락이라며 약간의 아쉬움이 대답에 담겼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이제 겨우 인생을 시작하는 첫 자락에 있었다.





바스켓을 타고 건너온 곳에는 온천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연신 뜨거운 연기와 물이 뿜어져 나오고 현지인들은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더운 날씨인데도 온탕에 들어가고 싶은지 의아했지만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온천은 마치 그들의 놀이터 같아 보였다.





가는 길에 잠시 차 밭에 들렀다. 드넓은 차 밭의 풍경은 온통 초록으로 싱그러웠지만 찻잎 하나하나를 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해야 할 노동의 무게가 몰려오는 것 같다.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 안 가 찻잎을 모은 커다란 보퉁이를 옆에 두고 앉은 검게 그을린 아낙들이 눈에 띄었다. 괜히 미안해서 슬그머니 차밭을 빠져나왔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차밭의 풍광은 아낙들의 수고는 나 몰라라 하고 햇빛을 받아 초록초록 빛나고 있었다. 차랑 기사는 증거 자료(?)로 쓰기 위해 나와 같이 찍은 사진을 남기길 원했다. 세상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것 같다. 나중에 좋은 리뷰를 남겨달라는 부탁에 그러겠다고 했다.





날씨가 어쩔 수 없이 큰 상전이다. 조용한 호숫가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울상을 하고 있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어린아이처럼 보채고 있어서 서두르지 앓을 수 없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한갓져서 좋았는데 아쉬움이 제일 많이 남는 곳이다.





이따금 비가 한 두 방울 흩뿌리기도 했지만 반둥시내로 들어오기까지 하늘은 그래도 잘 참아주었다. 기사에게 얘기해서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환전소에 들러서 환전을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차를 타니 이젠 도저히 못 참겠다고 그동안 참고 있던 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나의 행운이었다.





오전 8시 반에 출발해서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되었다. 혼자 나간 차량 투어라서 모든 일정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4일을 머무는 반둥에서 하루쯤은 긴 투어를 해도 될 것 같아 혼자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했지만 나름 쏠쏠했다.





남은 이틀은 쉬엄쉬엄 시내를 걸어 다니며 반둥에서 빈둥빈둥이나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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