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예약한 일정들을 모두 마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시간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라 혹시라도 과해서 탈이 날까 봐 걱정했는데 무사히 끝이 났다.
출발 전, 한국에서부터 부은 목의 임파선이 신경질을 낼까 말까 하고 있고, 장은 탈이 났는지 설사를 해대고, 여행에 반드시 지참해야 하는 여권처럼 속 울렁거림은 일찌감치 반둥에서부터 따라붙었다.
삼중고를 안고 어찌 다닐까 했는데 마무리가 잘 되어서 다행이다. 임파선이 아플 때마다 두둑이 받아온 약을 보약 먹듯이 털어 넣었다. 그러면 하루는 그런대로 버티다가 자고 나면 또 성질을 낼까 말까 변덕을 부린다.
달랏에서 장탈로 고생한 게 있어서 이번에는 한국에서 미리 약을 챙겨 왔는데, 그걸 먹었더니 장은
좀 누그러진 것 같다. 있는 동안 잘 구슬려서 크게 사고 치지 않고 돌아가길 바랄 뿐이다.
오늘부터는 여유 있게 다녀도 될 것 같아서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섰다. 오토바이로 말리오보로 여행자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카페인으로 무장을 하고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나는 여유를 부렸다고 했는데 아직 이른 지 길거리가 한산하다. 여행자 거리답게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양 옆으로는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지나다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바틱 가게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이번 여행에 인도네시아를 선택한 것도 순전히 바틱 때문이다. 주변 동남아 국가에도 바틱이 있었지만 그 오리지널이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꼭 한 번 와 보고 싶었다.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문양의 옷들이 행거마다 그득하다. 대부분 복잡한 문양들이 많아서인지 선뜻 한 곳에 눈이 가지 않는다. 2층이 있길래 올라가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직원이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2층에는 바틱 원단만 가득 쌓여 있다. 맘에 드는 프린트 원단이 있었지만 그냥 눈도장만 찍고 내려와야 했다. 1층 매장 중앙 행거에 멋진 원단이 걸려 있길래 손으로 작업을 한 거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방금 2층에서 보았던 원단은 기계로 작업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암만 봐도 차이를 잘 모르겠는데 그 답이 참 아이러니 하다.
기계가 한 것은 문양이 완벽한 반면 사람이 한 것은 선이나 문양이 판박이 찍어낸 것처럼 획일적이거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의 값진 수공이 그만큼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 모두 더 완벽하려고 애쓰면서도 완벽하지 않아서 값이 더 비싸다는 답에 나는 갑자기 옆구리를 찔린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의 손이 기계보다 더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 장의 원단을 완성하기 위해 누군가는 얼마나 숱한 날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붙고, 쌓이도록 그리고 그렸을까?
비록 한 장의 원단이지만 마치 한 나라의 국기처럼 그 앞에서 괜히 숙연해진다. 거쳐간 그 사람의 손길이 눈앞에 보이듯 그려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잘 몰랐던 기계와 손 그림의 차이가 눈으로, 마음으로 느껴졌다.
바틱가게를 나와 한참을 걸었더니 배가 고파서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그림을 보고 대충 시켰는데 내 입에 딱 맞다. 컵라면 정도의 양이라서 과하지 않고 주스와 같이 시켰는데 23,000루피아로 우리 돈으로 2,100원 정도이다.
맑고 시원한 육수에 밥과 야채, 닭고기가 잘게 들어 있어서 가뜩이나 울렁거리는 속이 불편했는데 나한테는 어느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은 그저 그만인 한 끼이다.
가볍게 한 끼를 잘 해결하고 나왔는데 걷기 시작하자 이 놈의 속이 또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적당한 벤치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림 그릴 준비를 했다.
이번 여행은 관광보다도 스케치 여행에 더 비중을 두었으니 쉬엄쉬엄 가다가 그리고 싶은 곳이 있으면 판을 펼치면 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오면 더욱이 혼자라서 쑥스럽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부딪혀보니 주변에 신경 쓰이지도 않고 편하게 그릴 수 있다.
오다가다 구경하거나 말을 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크게 방해되는 정도가 아니라서 한국에 돌아가서도 밖에서 날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이번 여행을 통해 생긴 것 같다.
그림을 완성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가는데 마차 아저씨가 자꾸 타라고 유혹을 한다. 대략 거리 한 바퀴를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더운 날씨에 말이 끄는 건 타고 싶지 않았다.
어떤 수레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모터가 달린 자전거로 끄는 수레였다. 4천 원이 조금 안 되는 요금으로 20분 정도 소요된다.
말리오보로 여행자 거리를 일대를 끼고돌던 기사는 어느 지점에 가서 수레를 세우더니 상점을 손으로 가리킨다. 와양을 만드는 곳이었다.
와양은 인도네시아 전통 인형극에 쓰이는 가죽으로 만든 평면 인형이다.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기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나를 덜컥 그곳에 내려놓는다.
가게 안에는 와양 말고 소형 목각 탈도 팔고 있었다. 맘에 드는 게 있어서 가격을 물어보니 우리 돈으로 6만 원을 부르길래 뒤도 안 돌아보고 가게를 나왔다.
수레에 올라 타자 가게 주인이 탈바가지를 들고 쫓아와서 얼마에 사겠느냐고 가격을 대 보라고 한다. 마음이 상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나를 아주 호구로 안 모양이다.
늦은 오후가 되자 뜨거웠던 햇빛도 가시고 바람도 불어서 제법 시원하다. 여전히 할 일 없이 말리오보로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누군가 Hi~~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아까 나를 태웠던 수레 기사였다. 그는 환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그의 미소가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서 하얗게 구름처럼 번지고 있었다.
조금 전에 태운 아는 사람이라고 지나가는 나를 굳이 불러 세워 아는 척을 해준 기사의 순박함이 파란 하늘에 걸린 뭉게구름 같다.
쓰고 있는 마스크 때문에 혹시 내가 화답하는 것이 보이지 않을까 봐 두 눈이 붙도록 일부러 크게 웃어 보였는데 그가 잘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다.
말리오보로에서 시작한 오늘 하루도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더불어 조금씩 조금씩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