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간단한 조식이 차려져 있다. 거하게 먹지 않으니 음식이 많을 필요도 없고, 대형 호텔에서처럼 밥 한 숟가락 먹는데 길게 줄을 설 필요도 없으니 나한테는 아주 안성맞춤이다.
음식이 정갈하게 나오기도 하지만 맛이 깔끔하다. 한국에서는 입맛이 없어 대충 먹었는데 이 숙소에 와서는 꼬박꼬박 차려주는 아침을 남기지 않고 먹는다. 우렁색시한테 장가든 사내처럼 아침이 행복하다.
오늘은 일찌감치 따만사리로 향했다. 검색을 하니 걸어서 20여 분 정도 거리에 있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쉬엄쉬엄 주변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갔다. 구글맵이 맞지 않아 조금 헤매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도착했더니 구글이 일러준 20분은 애초에 훌쩍 지나갔다.
제법 유명한 곳인데 가는 길은 꼬불꼬불 온 동네 골목을 다 휘저으며 간다. 벌써 뜨거워진 햇빛에 오토비이를 타고 올 걸 괜히 걸어왔나? 하는 후회가 슬그머니 들었다.
아마도 그 20분은 2미터 장신이 한 눈도 팔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을 때나 나올 것 같다. 드디어 따만사리 표지판을 보자 목덜미에 땀이 쪼르르 흐른다.
입장권을 25,000루피아에 구입했다. 설명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영어 가이드를 찾으니 이미 다 안내하러 나가고 없다고 한다.
입구 정원을 들어서자마자 대형 목욕탕이 나온다. 물이 생각 외로 엄청 깨끗하다. 수심은 어린이 풀장 정도의 깊이인데, 맑은 물을 보니 갑자기 수영이 하고 싶어 진다.
왕의 후궁들과 그 자식들이 거처하며 술탄이 휴양 차 이곳에 들르면 저 물에 꽃을 던져서 먼저 잡는 사람과 잠자리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설이 있다.
술탄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여자들의 뒷말이 골치 아파서 그랬을까? 그 시대의 복불복 같은 사다리 타기를 했으니 비겁하다고 해야 하나?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던지는 꽃을 서로 잡겠다고 물을 튕기며 달려가는 것을 연상하니 맑은 물에 그 장면이 고스란히 비치는 것 같다. 땅에서 하는 달리기도 도맡아 놓고 꼴찌를 하는데 물에서 하면 아예 꿈도 못 꾸는 나 같은 후궁은 청상이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평범한 범부를 만나 지지고 볶으며 꽁냥꽁냥 사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왕의 여자가 되어 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 자리의 맛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상상과 생각에 내 마음이 저 물빛 같지만은 않은 채 욕탕을 벗어났다. 다른 시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전과는 아주 다른 동네가 나타났다.
막 문을 벗어나자 문 앞에서 신분증을 착용하고 있던 직원이 내가 입고 있는 바틱 바지가 예쁘다며 말을 걸었다. 그가 건넨 말에 대답을 하자 그 직원은 얼씨구나 하고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확한 사무분장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이드는 아닌데 그곳의 공식 직원으로 틈새 공략을 통해 돈벌이를 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구멍 난 엿가락처럼 토막토막 끊어지는 발음 때문에 태반은 눈치로 알아먹어야 하지만, 어차피 나도 가이드가 있었으면 했으니까 적당한 가격으로 설명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따만사리는 아름다운 정원이리는 뜻으로 원래는 거대한 정원이었다고 한다. 술탄이 거느린 22명의 후궁과 그의 자식들이 살았는데 지진으로 많이 무너지고, 그 후 정원 대신 지금의 가옥이 들어섰다고 한다.
지붕은 파괴되고 몸체만 남은 곳은 파티룸으로 연회를 개최하던 곳이라고 한다. 마치 미로처럼 이어진 건물 안에는 명상실과 수로가 연결되어 있고 건너편 건물은 술탄이 오면 기도를 하던 곳인데 코로나로 폐쇄된 이후 아직 재개장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따만사리가 처음에 보았던 목욕탕을 일컫는 말인 줄 알았는데 거대한 정원을 포함하여 이 모든 구역을 통틀어 따만사리라 한다고 한다. 그가 던진 미끼를 알고도 덥석 물었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돌아보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고 재미있었다.
그가 나를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따만사리 안에 늘어서 있는 가옥들 초입에 있는 바틱 가게였다. 그곳에서는 바틱을 실제 그려볼 수 있다. 250,000루피아를 내면 흰색 티셔츠에 본인이 원하는 문양을 그린 후 가져갈 수 있다.
그것까지 사전에 연계된 관계의 고리일 것이다 안내를 해준 그에게 100,000루피아를 주고 바틱 티셔츠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번 여행동안 일부러 그런 장소를 찾아가서라도 하려던 참이었는데 여기서 할 수 있으니 잘 된 셈이다. 그곳에는 이미 네덜라드에서 온 여성 한 분이 커다란 티셔츠에 코끼리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튤립 문양을 따라 뜨거운 왁스로 선을 그려나갔다. 두껍고 깨끗하게 그어야 하는데 자꾸 어반스케치 하던 버릇이 나온다.
왁스로 선을 다 그리고 나면 염료와 물로 색칠을 한다. 염료통에 색 이름이 적혀있지만 인도네시아어 까막눈이라 일일이 물어 가며 색을 찾아야 했다.
내가 아는 색도 아니고 보는 것과 칠했을 때의 색감이 달라 색을 섞어 만드는 것이 많이 불편했다.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새삼스럽다.
색이 너무 강하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후처리를 하고 나니 원래 색의 반은 날아간 것 같다. 후처리 단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코팅제를 바른 후 30분 건조 - 찬물에 워싱 - 소다를 넣은 끓는 물에 왁스 용해 - 마무리 세척
겨우 꽃 몇 송이인데 꼼짝없이 제자리에 2시간 이상 앉아서 색칠을 완성했다. 빨리 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체되어 내일 찾으러 다시 와야 하기 때문에 코를 박고 그리고 일어나니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
시간이 제법 걸린다고 해서 근처 루왁 커피점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와서 후처리 과정을 지켜보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가게 주인은 벌써 다 끝을 내고 커피점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꼭 보고 싶었던 과정을 놓친 터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구경할 수 없냐고 물으니 보여주겠다고 한다.
코팅제가 아직 덜 말라서 기다리는 동안 그제야 가게 안의 다른 바틱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페낭 갤러리에서 보았던 만큼 예술적이진 않지만 내가 언제 다시 바틱을 접하는 곳을 여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바틱액자 하나를 사기로 했다.
500,000루피아인데 티셔츠 수강도 한 터라 50,000루피아를 깎아준다. 부피 때문에 액자는 분리하고 원단에 묻은 먼지 때문에 다시 세척해서 다려주었다
그러는 동안 코팅제가 말라서 후처리를 하겠으니 보라고 한다. 처음의 강한 색은 물에 씻겨 나가면서 많이 순해지기 시작했다. 판매하는 상품만큼 선명한 색을 띠려면 얼마나 진하게 칠해야 할지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몇 번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티셔츠가 완성되었다. 만들어져서 걸려 있는 것만 봤을 때는 미처 몰랐던 과정이 가격과는 아무 상관없이 모든 과정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혼자서 후둑후둑하면 편할 텐데 주인아저씨는 싫은 내색 없이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다.
마무리된 티셔츠를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할 때는 어느새 여섯 시를 훌쩍 넘어서고 따만사리를 찾았던 여행자들도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아 있다.
꼭 바틱을 해 보고 싶었고, 꼭 알고 싶었던 처리 과정을 보고 나니 하루를 꼬박 쏟아부은 시간이 아깝지 않다. 후련한 숙제를 기꺼이 한 것처럼 홀가분하다.
주인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따만사리 골목에 어둑어둑 보랏빛 어둠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