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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Jun 22. 2023

비움, 그리고 채움




75리터 쓰레기봉투 몇 장을 샀다. 잘 사용하지 않고 쟁여두기만 한 것들을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동안 그런 마음이 안 든 것은 아니지만 내일 하지, 내일 하지..... 하거나, 혹시 나중에라도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미루고 있었다. 예전에 책과 그림을 모조리 정리하면서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1년이 가도 손을 대지 않는 물건들이 아직도 많다. 

그러다가 이번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발리 우붓에서 머무는 동안 빽빽한 스케줄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여유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묵었던 숙소가 우붓 시내와 가까워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언제나 많은 여행객들로 북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denisngjd, 출처 Unsplash




똑같은 상점, 똑같은 날씨, 똑같은 분위기......  다를 것 하나 없는 똑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어느새 출국할 날이 다가왔다. 길을 걷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내가 내일 출국하고 없어도 이 우붓은 지금처럼 여전히 붐비겠지...... 내가 떠난 것과 상관없이, 내가 없는 것도 모른 채, 지금과 똑같겠지...... 

그 생각 끄트머리에 삶의 가벼움이 딸려 들어왔다. 젊어서는 목표물을 향해 정신없이 치달아 왔는데, 이 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그렇게 나를 달리게 했던 목표의 무게도 많이 가벼워졌다. 최선을 다 했으니 후회는 없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 kssamoylenko, 출처 Unsplash




젊어서는 채우려고 애를 썼다면, 이젠 비워내야 할 때인 것 같다. 내가 떠나고도 어제와 똑같은 우붓처럼, 내가 왔다 갔는지, 머물렀는지도 모를 이 세상에서 무엇을 그리도 많이 거머쥐고 있었는지 어느새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가득 찬다. 나의 옛 시간과, 추억도 함께 담는다. 

그리고 비워낸 그곳에 나이가 소리 없이 찾아와 빈자리를 채운다. 이젠 물건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나이와 그 기억으로도 삶을 기꺼이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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