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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ug 10. 2023

흰머리 소녀와 커피잔




인도네시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집을 한 번 뒤집어엎고는 구석구석 짱 박아 놓은 안 쓰는 물건들을 일제히 정리했다. 그중에는 주방 상부장에 고이 모셔 놓기만 했던 커피잔도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버릴까 했는데 주변에서 당근 마켓에 내놓아 보라고 해서 쓰레기 처리 비용이라도 아낄 수 있을까 해서 사진을 찍어 올렸다. 

영국산 커피잔이 여러 세트 있었지만 간편한 머그만 사용하다 보니 세월만 묵히고 있었다. 아끼는 잔 단품 몇 개만 남기고 4세트를 모두 당근 마켓에 내놓았다. 그랬더니 올리기가 무섭게 바로 연락이 왔다.

"이 브랜드를 너무 싸게 내놓았는데 혹시 흠집이 있는 건 아니에요?"
"왜 이렇게 싸게 내놓았어요? 이 가격이 맞아요?"
"금장 테두리가 벗겨진 건 아닌가요?"





© erol, 출처 Unsplash





올려놓은 커피잔 브랜드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빨리 팔 수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너무 싸게 내놓은 탓에 뜻하지 않은 검증(?)을 몇 차례 더 거쳐야 했다. 물건 정리 중이라서 싸게 내놓은 것이며, 테두리와 원산지 부분은 사진이 잘 보이도록 다시 찍어서 보내주었다. 

그러자 이내 구입하겠다며 바로 송금을 했고, 코로나에 걸려서 1주일 후에 와서 가져가기로 했다. 내게 필요 없는 물건이라 화려한 브랜드의 명성도 처분을 주저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지만, 깨어지지 않게 하나, 둘 종이에 싸서 포장을 할 때는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상부장을 열 때마다 기분까지 화사하게 해 주었던 핸드 프린팅 세트, 깊고 오묘한 진갈색의 음전한 세트 ...... 잘 사용하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게 와서 머물렀던 시간을 덜어내는 허전함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 craft_ear, 출처 Unsplash




약속한 1주일이 되자 아침 일찍 커피잔을 가지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포장을 다시 한번 체크해서 집 앞으로 나갔다. 장소를 단 번에 잘 찾지 못해 주변에서 맴도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더니 잠시 후에 승용차 한 대가 내가 서 있는 곳에 와서 멈추었다. 


"당근, 커피잔 가지러 왔는데요"
"아, 네. 맞습니다"
"아이고! 늙은 이가 아직도 이렇게 욕심이 많아서 되겠나?"


뜻밖에도 차에서 내린 사람은 70대로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였다. 그 옆 조수석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고 오는 동안 위치 확인을 위해 문자를 보낸 것은 남편 역할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송금인이 남자 이름이어서 의아했었는데 모든 궁금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 jacksondavid, 출처 Unsplash




3,40대 젊은 여성이 가지러 오지 않을까 했는데 노부부가 온 것은 실로 예상 밖이었다. 겹겹이 싼 커피잔을 뒷 좌석에 실어 주고 "잘 쓸게요~~~" 하는 인사를 남기고 가는 노부부의 차를 뒤에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이 나이에 비우려고 애쓰는데 아직도 예쁜 커피잔이 눈에 들어오는 그녀에게서 사춘기 소녀 같은 설렘이 보였다. 

남편은 송금과 위치 확인을 담당하고, 아내는 운전을 담당하고 와서 커피잔을 가져가는 모습이 맑은 수채화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함께 늙는 것은 저렇게 서로 동화되는 것일 것이다. 젊은 남편이라면 선뜻 짬을 내어 아내의 당근 마켓 물건을 찾으러 동행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그들이 떠나고 없는 빈자리에 서서 혼자 빙긋 웃음을 지었다. 

노부부의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한 꼬집 넣은 향 좋은 커피와 함께 서로가 서로의 눈동자에 오래오래 비치기를 바랐다. 그 안에 내가 보낸 커피잔도 같이 있기를 기원하며 잠시 들었던 서운함을 툭툭 털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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