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구르다가 말......

by 파란 해밀




이사 오고 나서 적당한 산행 코스를 알아보았으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입사 동기와 일주일에 한 번씩 트래킹을 즐겼는데 이곳으로 온 이후로는 잘 이어지지 못해서 많이 아쉽다. 이사 오면서 잃어버린 커다란 손실이다.

지난 금요일 오전에 딱히 특별한 계획이 없어 오랜만에 걸으러 집을 나섰다. 집 옆에 있는 하천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곳이 있긴 한데 길이 너무 뻔하고 짧아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어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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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걸을만했다. 얼마를 갔을까? 70대쯤으로 보이는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 세 분이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주위에 걸을 만한 등산 코스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근처에 있다며 알려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혼자 산을 올랐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도 하고 산을 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약간 긴장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르는 길, 가보지 않은 길을 혼자 갈 때는 자꾸 주춤거리게 된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길이든, 보이지 않는 길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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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쯤 오르자 성곽이 눈에 띄었다. 왜구에 맞서 산 정상에 빙 둘러쌓아 놓은 커다란 돌무더기에는 수백 년 세월의 묵은 이끼를 화려한 휘장처럼 두르고 있었다. 커다랗고 편편한 큰 바위가 있는 가하면 틈새를 메꾸고 있는 작은 돌멩이들이 어우러져 성벽을 이루고 있었다.

정상까지 오르다 보면 가끔 숨이 차는 구역이 있다. 맨몸으로 오를 때도 숨이 차는데 무거운 바위를 이곳까지 옮겼을 누군가는 더 가쁜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뜨거운 숨이 베어서일까? 더운 땀이 스며서일까? 유독 성곽의 바위가 검다. 수백 년이 지나도 생생한 그때의 까맣게 타들어간 속내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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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따라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금은 그저 아무렇게 쌓아 놓은 야트막한 돌무더기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래도 저 돌들은 세상에 존재해야 했던 이유를 온몸으로 검게 내뿜고 있다. 그래, 저 돌들도 존재의 이유가 있었구나.......

내가 온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을 했는지 물어본다.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저 바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가 없어 궁색해진다. 그저 초로에 접어든 아낙의 등 뒤에는 속절없이 지나간 청춘이 굵은 비듬처럼 툭툭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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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다 내려오도록 머릿속에 바위가 가득했다. 나에게도 커다란 바위 틈새를 메우고 있는 작은 돌멩이 같은 의미라도 있었나? 그만큼이라도 살았는지...... 어쩌면 세상에 부딪히고 구르다 멈추면 그뿐이고 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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