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 사계절이 바뀌었다. 빠른 듯, 더딘 듯 이리저리 부딪히고 버티다 보니 어느새 1년이 되었다. 어쩌면 이사라기보다 독립이라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많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살아보는 것이 실현 가능성 없는 막연한 나 혼자만의 바람인 줄 알았는데, 마침 주변 상황이 일부러 맞춰주기라도 하 듯 퇴직과 함께 잘 맞아떨어졌다.
젊은 날, 정신없이 관계에 얽혀 닥치는 대로 살고 보니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이 나던 검은 머리칼은 푸석한 백발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나이도 꼬박 한 바퀴를 돌아 내게는 닥칠 것 같지 않던 환갑도 몇 년 전에 넘겼다. 이제야 한 독립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이제야라도 아찔한 모험 같은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막상 살아보니 생각과 현실에는 많은 괴리가 있었다. 책임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안고 가야 할 또 그만큼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덜어내는 짐만 생각했지, 새로 짊어져야 하는 짐에 대해서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혼자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내가 부담해야 한다.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미룰 수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떼어낼 수 없는 선택에 대한 당연한 값이다.
막연하게 예상했던 것과 현실의 간극에서 적응하느라 처음에는 상당히 애를 먹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고, 가끔 휘청이기도 했다. 되돌릴 수 있으면 다시 돌릴까? 하는 고민도 진지하게 했었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버틴 것은 지나간 세월이 일러준 귀동냥 때문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나 상황도 버티고 헤쳐 가다 보면 보물 찾기의 꼭꼭 숨겨 놓은 선물 같은 것이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서 그럴 수도, 차츰 생각에도 근육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은 늘 그랬던 것 같다. 처음부터 달콤하거나 완전히 달콤하기만 하지 않다. 그렇다고 온전히 쓰기만 하지도 않았다.
초저녁부터 들리는 풀벌레 소리에 온통 마음을 다 내어주기도 하고, 한갓진 동네의 풍경에 취해 그냥 계속 살까? 하며 바람에 펄럭이는 줄에 널린 빨래처럼 변덕이 춤을 추기도 했다. 주변에서 몇 명 지인을 사귀기도 하고, 즐겨하던 일상의 루틴을 찾아 이젠 생활에 틀이 잡히기도 했다.
금방 씻어서 널어놓은 것 같은 파란 하늘, 계절마다 다르게 피는 길가의 들꽃들을 바라보며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때로는 아쉬울 때가 있다. 가족들과 함께 살았어도 내가 지금 나누고 싶은 것을 무심한 세 남자들과 나눌 수 있었을까?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아마도 혼자라서 드는 괜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군중 속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둘이 있어도 혼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혼자라서 가끔 혼자라고 느끼는 것은 최소한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어차피 각자 짊어지고 가야 할 혼자의 무게는 있기 마련이니까.....
제일 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떠났던 때가 생각난다.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혼자 나섰던 그날의 막막함과 두려움, 그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왔던 살 떨리는 아찔함과 설렘...., 세상의 이치가 그 안에 있었던 것 같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완벽하게 좋거나, 철저하게 나쁘기만 하지 않았다.
좋은 일에도, 궂은일에도 취하고 느낄 게 있었으니 닥쳐오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삶의 문제를 잘 풀어가는 해법인 것 같다. 아직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자신 있게 늙어 가기 위해 생각에 지그시 힘을 주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