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파란 해밀



작년에 큰마음 먹고 온갖 정성을 쏟아 담았던 김장이 큰 실패를 보았다. 충분히 익었으리라 잔뜩 기대를 하며 김치통을 열어 본 순간, 무슨 이유인지 김치 일부가 갈변해 있었다. 그나마 맛이라도 있으면 괜찮았을 텐데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이상 야릇한 맛이라 처리도 못하고 그냥 김치냉장고에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나마 김치찌개로는 먹을 만해서 거의 1년이 다 되어 갈 즈음 겨우 통을 비울 수 있었다. 그 여파는 의기충천했던 나의 자신감을 단번에 추락하게 했다. 그래서 올해는 김장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또다시 그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를 모르니 대처를 할 수도 없고, 거기에 들어간 재료비며 나의 열정(?)과 시간, 한껏 부푼 기대마저 일거에 사라지니 허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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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올해는 김장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친정 언니가 삼세번이니 한 번 더 해보라고 한다. 이번에는 괜찮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김치가 있어야지. 사 먹는 건 아무래도 두고 먹으려니 맛이 없어....... 하면서 자꾸 나를 부추겼다. 그도 그럴 것이 김치만 맛있으면 다른 산해진미가 필요 없는 사람인데 싶어 다시 마음을 추슬러 김장을 담기로 하고 절임 배추를 주문했다.


배추가 도착할 즈음, 무를 사러 슈퍼에 갔다.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아 큰 시장으로 사러 가야 하나? 그냥 시답잖은 슈퍼 무로 할까? 하고 고민하던 중 당근에서 무 한 개를 천 원에 판다는 글을 확인했다. 글을 올린 사람은 마침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고, 방문하면 직접 밭에서 무를 뽑아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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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가끔 산책하러 아파트 뒤로 걸어 나가면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거기 사는 분인가? 하며 좋아했다. 거기서 싱싱한 무 두 개만 사 오면 충분할 것 같아서 바로 연락을 했더니, 실제 밭은 제법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수영장에서 집으로 오는 중간쯤이어서 작심하고 들르기로 했다.


한적한 동네 뒤로 배추, 무, 파 등이 심어져 있었다. 글을 올린 사람은 젊은 며느리인데 시댁에 와서 주변 밭 일을 자주 도와드린다는 것이다. 요즘 보기 드문 며느리였다. 나를 데리고 간 밭에는 시퍼런 무청을 잔뜩 풀어헤친 싱싱한 무가 열을 지어 꼿꼿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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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좋아 보이는 시어머니가 무를 뽑아주려고 나왔다. 몇 개가 필요하냐는 말에 달랑 두 개만 주세요 하는 소리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며느리는 벌써 무를 담을 커다란 포대를 챙겨 들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되도록 튼실한 무를 주려고 이미 무를 고르고 있었다.


다섯 개도 너무 성의가 없어 보여 얼떨결에 열 개를 담아달라고 했다. 몇 초 동안 머리를 굴렸다. 평소 알고 지내는 아랫집에 세 통 정도 안기고 나머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는 계획에도 없는 코끼리 다리통 만한 무 열 개를 보쌈하듯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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낑낑거리며 무 두 가마니를 현관으로 옮겼다. 무 세 통을 안기려고 했던 지인은 여행 중이라 고스란히 열 통을 감당해야 했다. 찬 바람이 드는 앞 베란다로 무를 다시 옮겨놓고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부산에 살고 있었다면 근처에 사는 친정 언니에게 한 가마니 나눠주고 이래저래 소비를 했을 텐데 적당한 크기 두 개만 있으면 되는데 난데없이 들고 온 무 두 가마니를 보니 눈앞이 아뜩했다.


친정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 얘기를 했더니, 배추김치에 채 썰어 넣고 무김치도 담으라고 한다. 그래도 아직 한 가마니가 남았다고 하니 동치미를 담으로 한다. 평생 담아 본 적도 없는 동치미를 물어 물어 겨우 담았다. 그래도 세 덩어리가 남았다고 하니 이번에는 무차를 만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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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깊은 줄도 모르고 연신 채를 썰어 소쿠리에 얇게 깔아 바람이 드는 베란다에 놓고는, 들며 날며 아래 위로 번갈아 바람을 쐬어주었다. 하루하루 무 채는 야위어가더니 며칠이 지나자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한 듯 양이 훅 줄어들었다. 처음으로 만들어 본 무차 맛이 궁금해 끓여 보았더니 의외로 맛있었다. 연한 둥굴레차 맛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무 두 덩이를 냉장고에 넣고 포대 자루를 정리했다. 코 끝에 알싸하고 시원한 무 향이 맴도는 것 같았다. 단 돈 만 원으로 혼자 들지도 못하는 무 꾸러미를 받아왔는데 덤으로 뭔가 더 얻어 온 것 같다. 흙냄새 가득한 무 덩어리가 무엇이라고 나는 한동안 그 안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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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다시는 부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또 하나 품었는지 모르겠다. 물 많은 달큼한 무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식도를 훑으며 내려가는 그 짜릿한 유혹에 온통 내 마음을 다 내어주었는지 모르겠다. 꼴랑 무 하나에 넘어갈 그런 값싼 여자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무를 자르다 말고 나는 연신 자투리 무를 집어먹고 있다.


내가 업어 온 무라서 더 애착이 간다.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밭에서 직접 골라온 거라 마음이 더 간다. 난생처음 맛본 첫 경험에 나도 몰래 자꾸 마음이 녹아내린다. 아직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곳에 뿌리가 조금씩 내리고 있는가 보다. 때로는 산다는 게 참 어이없고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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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아직 남은 무를 꺼내 썰어 말려야겠다. 말린 무가 생각지도 않은 전혀 다른 오묘한 맛을 우려내듯, 내가 우려낸 내 삶의 맛은 어떤 맛일까? 제멋대로 생긴 무도 저토록 그윽한 맛을 뿜어내는데......

괜히 생각을 다시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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