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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morebi Nov 14. 2020

dullness

I don’t need no doctor


 칙칙하다. 하늘도, 공기도, 거리도, 건물도, 사람도, 그림자도. 엄마나 아빠로 보이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의 옷마저 칙칙합니다. 저 아이들은 그런 칙칙함을 알고 입은 것일까. 저 어른들은 칙칙함을 알고 아이에게 옷을 입혔을까. 거리를 걷는데 늘 걷던 거리라 지루합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서 걸어도 뒤돌아보면 걸었던 거리가 됩니다. 그런 낡은 길을 나는 매일 걷습니다.


 거짓 없이 글을 쓴다는 게 이리 어려운 건지 몰랐습니다. 솔직함이라는 게 얼마나 솔직해야 솔직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표현한다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듭니다. 그런 의문을 품고 글을 씁니다.


 솔직한 마음을 갖는 데에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만 필요합니다. 그게 나의 결론입니다. 나는 환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의 일부가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땐 어떡하면 좋을까요. 그러면 저는 과연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폼클렌징으로 세수를 했습니다. 그다음 면도를 하려고 했는데 폼클렌징으로 세수를 했습니다. 가끔씩 있는 실수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폼클렌징으로 세수를 했습니다. 그제야 거울 속 비친 제 얼굴을 만져봤습니다.


 저는 이름이 예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엔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을 전부 다 알지 못합니다. 아니, 거의 모른다고 해도 됩니다. 하지만 한 사람만큼은 동명이인 포함해서 어느 이름 중에서 제일 예쁜 색을 비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칙칙했던 저의 마음에 색을 만들어줬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문득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땐 어떡하면 좋을까요. 저는 더 이상 그게 무슨 색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친구랑 서울의 어느 덮밥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엄청 짜고, 느끼한 고기에 가성비 떨어지는 가격대의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가게였습니다. 맛있다고 소문나서 제가 가자고 해서 처음 가봤습니다. 친구한테 미안해서 제가 계산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다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라멘 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맛없었던 덮밥 가게를 얘기했습니다. 그 친구가 제 얘기를 다 듣고서 하는 말이 다른 친구랑 헷갈린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순간 머리가 칙칙한 색으로 뒤덮였습니다. 이럴 땐 어떡하면 좋을까요. 꿈에서 저 혼자 추억을 쌓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확히 몇 번을 까먹고 폼클렌징으로 세수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지금은 그 사람의 예쁜 이름이 기억이 나지만 언제, 얼마나 기억이 안 났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다시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분간이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저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일부만 기억한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게 지금 저에겐 전부이니까요. 이만큼 솔직하면 저는 의사가 필요 없는 게 아닐까요. 지금도 칙칙한 필름이 머릿속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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